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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얌 Sep 19. 2022

떠리마까시

'감사합니다'라는 이 말을 잘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자카르타 여행 첫날, 세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중 하나인 보로부두르 사원(언덕 위의 사원이란 뜻)으로 갔다. 가이드는 이 불교사원이 9세기경에 세워진 건축물로, 약 천 년 간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가 1814년 영국 통치 시대에 반쯤 매몰된 탑이 나타나면서, 이십여 년에 걸쳐 발굴이 완료됐다고 했다. 그 후 네덜란드 통치 시기 ‘유네스코’ 주도하에 다시 복구가 진행되던 중 지진도 겪고 도난도 당했다고 한다.



가장 시선을 끌었던 것은 머리 없는 불상이었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불상의 머리는 태국 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앙코르와트 유적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었으나 이 사원은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 사원’으로 그 웅장하고 화려했다.


석불의 재료로 사용된 검은 돌은 ‘안산암’(화산암의 일종)으로 돌과 돌 사이 홈을 파 ㄱ, ㄴ, ㄷ 모양으로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고 짜 맞췄다. 우리 한옥을 짓는 방식과 닮아서 더 친근감이 드는 한편 경이로운 신비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석불에는 하늘을 동경하고 신을 섬기면서 열심히 살고자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화엄경’에 따르면 맨 꼭대기의 거대한 탑은 불교에서 말한 공(空)을 상징해 텅 비어있다고 한다.  삶에 대한 깊은 철학이 잘 드러나 있었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종교인이 되는 것인지... 스쳐가는 사람들의 미소가 부처를 닮아있다.




인도네시아는 불교 사원, 힌두교 사원이 함께 공존하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또 이 나라 국민 중 약 80%가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며, 20% 미만은 힌두교, 불교 외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마치 '인간 만물상' 같았다.


그들의 낙천적인 얼굴 표정은 이방인인 우리들 마음도 열게 했다. 버스 창밖으로 바라본 풍경은 구멍가게가 즐비했고 가족을 오토바이에 싣고 쌩쌩 달릴 때 곡예 마당 줄타기 모습처럼 아찔했다. 네덜란드의 360년 통치, 일본의 3년 통치, 2차 대전 후 비로소 독립은 했어도 다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으로서의 수난이 많았던 것도 우리나라의 고단한 운명과 닮아 있었다. 어려운 역사 속에 살아남아 꿋꿋하게 오늘을 일구어 낸 이 나라 국민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히잡을 쓰고 앞을 가던 여인 둘이 갑자기 보자기를 깔고 엎드리더니 두 손을 모아 반복 기도를 했다. 우리도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들을 따라서 가이드에게 배운 말로 “떠리마까시”(감사합니다)를 입속으로 되뇌었다. 기도가 끝나자 그녀들과 어울려 사진도 찍었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기도하는 마음은 한마음이었다.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하기 시작했을 때 남편이 배를 만지면서 얼굴이 노랗게 변해 갔다. 나는 이륙 순간이라 안전벨트도 풀지 못하고 쩔쩔매며 옆 좌석의 동생 부부를 쳐다보았으나 그들 역시 기내라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지나 스튜어디스가 다가오자 나는 너무 당황해서 가이드한테서 배운 한 마디“떠리마까시”란 말만 되풀이했다. 그녀와 나는 남편을 부축해 화장실로 갔다. 좁은 화장실에서 남편을 잡고 있는 동안 나는 숨도 쉴 수 없었다. 하늘이 노오랗게 변한다는 말을 그때야 이해하게 됐다. 남편의 손발을 주무르며 정신을 차리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자카르타에 착륙했다. 항공사 직원이 얼른 휠체어를 가져왔다. 그리고 보호자는 한 분만 남아야 한다고. 그때 제부가 선뜻 내가 남겠다는 말 한마디가 너무 반가웠다. 타국에서 갑자기 휠체어를 탄 남편과 제부가 응급실로 가는 뒷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눈물을 참으며 한국행 아시아나 항공기를 탔다.


나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다. 평소에는 신을 찾지도 않았는데 이 시간만은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것이 인간인가 싶기도 했다. 며칠 동안 여행하면서 본 불상과 탑들이 내게 종교적인 마음을 심어주었을까? 그러는 사이 다섯 시간이 지나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동생이 제부와 통화를 하니 남편은 주사를 맞았고 지금은 호텔에서 휴식 중이라며 내일 오겠다는 전화였다. 동생과 나는 ‘십년감수’라고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는 커피 잔을 앞에 놓고 내가 “떠리마까시”라고 하니 동생도 “사마사마”(괜찮아)라고 했다.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오늘 아침 마트에서 히잡을 쓴 여인을 만났다. 카트에 채소와 과일을 잔뜩 사서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그 여인은 평소 공동 수돗물 가에서 만난 적이 있고 길거리에서도 자주 스쳤던 여인이라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내가 먼저 “떠리마까시” 라고 말을 건네니 그녀도 웃으면서 “사마 사마 사마사마”라고 했다. 여태껏 말없이 지나치던 타국의 여인과 비로소 이웃이 되었다는 친근감이 들었다. 이 여인은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힘이 된 말, ‘떠리마까시’를 모시고 머나먼 타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분이리라. 


다 좋다 마지막에 한순간 남편을 잃을 뻔했던 여행이었다. 반평생 투닥거리며 살아온 남편이지만 서로 다른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재회하자 내 입에서는 절로 '떠리마까시'란 말이 나왔다.


떠리마까시, 우리말로 '감사합니다'라는 이 한마디를
앞으로도 계속 잘 모시고 살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해본다.


이미지 출처:픽사베이


표제:  Engin Akyurt

본문

       1. jumbojet

       2. Uly Al Mafruhah

       3.  Kanen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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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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