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 혼수의 반전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오늘 밤 매미 소리가 유난스럽다.
장롱에서 이불을 꺼낸다. 빳빳하게 풀 먹여 발로 자근자근 밟아 곱게 손질한 모시와 삼베 이불은 마디마디에 접힌 희미한 골이 세월의 무늬 같다.
이불을 펴니 방안은 금세 노란 국화밭으로 바뀐다. 상큼한 삼나무와 모시 나무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얼굴이 여름밤 이불에서 날개를 단다.
삼베 이불은 특히 내가 결혼할 때 혼수로 선호했던 품목이었다. 광목, 옥양목, 모시, 인견 등과 함께 생활의 필수품과 혼수였건만 이제는 변하는 시대 속에 밀려나있다.
특히 오래된 왕 닷새 삼베 이불은 이불가게에서조차 푸대접을 받으면서 드문드문 볼 수는 있지만, 삼베만은 수의를 만들 때 아직도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어느 여름, 초등학교를 다니던 외손녀가 전화가 왔다.
"할머니, 나 방학했어요! 통영 가려고요!"
손주들이 오면 이불이 모자랄 것 같아 얼른 이불가게로 갔다. 가게에 진열되어 손님을 기다리는 이불들이 다양하다. 인견이불, 모시메리 이불, 속칭 냉장고 지짐이 이불 등, 그중에서 '냉장고'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지짐이 이불'과 모시 베개 한 세트를 선택했다. '지짐이'라는 이름도 특이하고 또 시원한 페이즐리 무늬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요즘은 왜 삼베 이불이 보이지 않는가요?
“요즘 누가 삼베 이불을 덮는가요?”
손님인 내게 되묻는 가게 주인의 말에서 새삼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꼈다.
이불을 사서 돌아온 날, 어릴 적 베틀로 천을 짜시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불현듯 그리워졌다. 어느새 그분들의 나이를 차례로 지나온 내 머리카락이야말로 삼베실을 닮아있었다. 천을 짜는 마음으로 그 시절을 추억하는 글을 한 행 한 행 써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한 수의 시가 되었다.
외갓집은 기역 자로 된 골목 끝 집
사립문을 열고 들어가면 베틀에서 내려와
나를 껴안아 주던 외할머니
‘내 새끼 먼 길 왔어’
엉덩이를 토닥여 주던 주름진 손바닥
가마솥에 푹푹 삶긴 삼나무 껍질 한 입으로 훑어
가늘어진 삼베 올을 무릎으로 쓸고 쓸어
배배 꼬인 실 돌돌 말아 광주리에 고봉으로 담으시던 외할머니
목화밭에서 목화송이가 배냇짓으로 입술 반쯤 벌리면
아기 볼같이 통실 동실한 목화솜 한 아름 듬뿍 치마에 담아 오던 어머니
내 유년 한 방에서 두 베틀로 마주 보며 투닥투닥 베틀 소리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묶은 세월
삼베 이불은 또 다 커서 어엿한 부모가 된 자식들의 어릴 적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여름밤, 삼베 이불을 덮어 주면 깔끄럽다고 발로 차 버리던 어린것들 때문에 나는 종종 선 잠을 자곤 했으니....
옛것은 불편한 것이라는 이유로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클릭 한 번이면 이불도 장바구니에 뚝딱 담고 주문하는 세상이다. 물레로 실을 잣고 베틀로 천을 짜는 세상을 예찬했던 인도의 간디 수상이 기억난다. 간디는 대량 생산으로 인해 일하는 행복과 장인 정신을 잃어가는 인류를 걱정했다. 간디의 철학은 존경하나 그 시절로 돌아가기에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등잔불 시절, 여인들은 온종일 구석방 베틀 앞에서 허리 펼 새도 없이 베를 짰다. 등 땀이 밴 적삼을 벗지도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서 한 올 한 올 씨줄 날줄로 엮었다. 무명과 삼베의 올과 올 사이에는 그들의 땀방울이 스며있는 것이다. 한 필의 천, 그것은 세월 속에 버티어 온 여인들의 넓고도 깊은 마음이다. 또 그들이 견뎌온 시간이고 그들이 가족을 감싸 온 정이다.
무엇보다 삼베 이불이 내게 각별한 것은 대를 물려 전하는 혼수이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 딸 집에 들렀더니 삼베 이불이 침대 위에 깔려있었다. 사각사각한 촉감이 바깥에서 먹었던 더위를 식혀주는 것만 같았다. 삼베 이불은 일 년 내내 장롱에서 지내다 비로소 밖으로 나온 것이 기분 좋은 양 깔깔해 보였다. 딸에게 “너희 집 이불도 이제야 외출을 했네”라고 하자, 딸은 그 이불 덕에 외손녀가 잠을 잘 잤다고 했다. 딸은 어릴 적 삼베 이불이 까슬까슬하다며 안 덮으려 했는데 외손녀는 그 까슬함이 시원한 줄 알다니... 신통했다.
딸의 혼수로 해주면서도 딸이 삼베의 가치를 몰라줘 서운했던 내 마음도 어느새 환해졌다. 이불 한 장이 나와 딸, 외손녀를 하나로 이어주다니... 어릴 적 내가 외손녀의 나이일 때 베틀 앞에서 베를 짜던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