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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얌 Sep 02. 2022

아버지의 왕관

아버지에게 '모자'는 무엇이었을까

하늘 모자를 쓰고 계신 아버지

높고 높은 곳에서 누가 부르시던가요

일 년에 두 번

부모님 제사에 쓰신 중절모자

이제는 벗지도 않고 계시는지요

몇 십 년 방 지킴이로

참종이로 곱게 싸서

아버지의 영혼까지 모시던 모자

지금은 멀고 먼 어디서

수정처럼 맑은 모자

하늘하늘 쓰고 계시는지요



        자작시, <아버지의 모자>



어부인 아버지께 가장 소중한 물건은 '배'였다.

또 하나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소중한 물건이 있었다.

흙담 두 칸이 전부인 큰 방 모퉁이에 걸려 있다 일 년에 두어 번 바깥 나들이를 하던 물건이었다.

회색 중절모.

옥양목 두루마기와 함께 걸려있던 이 모자를 손으로 내려 머리에 쓰실 때, 아버지의 표정은 마치 왕관을 쓰는 임금님처럼 근엄하셨다.


보석이 박힌 것도 아닌 그저 회색뿐인 중절모였지만, 아버지께서는 어느 왕국의 보물 보다 더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들 듯 그걸 대하셨다.

'아버지의 왕관'은 그렇게 늘 우리 집에서 가장 높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왕관'에도 뜻밖의 운명이 찾아들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초여름의 소슬한 비가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돛단배로 물고기를 잡아 어려운 우리 집 생계를 꾸려가시던 아버지, 

바다 위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실 때도 그렇고 육지에서도 늘 온화한 낯빛이신 것이 신기하셨던 아버지.

그해 당신 아버님 제삿날에도 깨끗한 옥양목 두루마기에 그 '왕관'을 쓰시더니 동생과 나의 손을 잡고 길을 나서셨다. 

제사를 지낼 종갓집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마산행 배를 타기 위해 시골 십 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가는 중에 아버지는 우리가 사는 민양 마을을 지나 한실 고갯마루에서 쉬어가자면서 바위에 앉으셨다. 

동생과 나도 함께 앉았다. 

비는 그쳤다 또 내리고 하더니 어느새 세찬 비바람이 불었다. 

한차례 불어온 바람에 아버지가 쓰고 있던 회색 중절모는 힘없이 공중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저 멀리로 날아갔다.


날아간 모자를 보며 긴 한숨을 내시던 아버지는, 우리 손을 잡고 집으로 발길을 돌리시며 집으로 가자라고 하셨다.

어린 나는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되돌아오며 왠지 억울하고 답답했다.


  '그 모자가 대체 뭐길래...  진짜 무슨 왕관이라도 된다고... 치이....'


도시에 다녀오면 학급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려고 했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내 마음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비바람 속에 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집으로 왔다.


모자를 잃고 난 후에 제사 때가 되면 어머니는 온 동네 집집마다 모자를 빌리려 다니셨다.

잃어버린 모자와 비슷하게 생긴 중절모를 빌릴 때면 아버지께서는 제사에 가셨다.

때로 그런 모양의 모자를 못 빌리시면 제사에도 가시지 않으셨고 온종일 방에서 근심 어린 모습으로 앉은 채밖으로 나오지도 않으셨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중절모자를 쓰고 지나가는 노인을 볼 때면 아버지가 떠오른다.


'지금쯤 어느 하늘에서 우리를 보고 계실까?

그때 잃어버린 모자를 찾아서 쓰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옥황상제가 돼서 진짜 왕관을 쓰고 계신 건 아닐까?'


이따금 어린아이 같은 상상에 미소를 짓는다. 




창밖에 소록소록 단비가 내리는 한낮의 여름, 기품 있게 모자 쓰신 아버지의 모습이 빗물이 되어 촉촉히 스며든다. 

은회색 모자가 푸른 바다를 향해 갈매기처럼 날아가더니...꿈이었다.


얼마가 남은지도 모를 남은 인생, 요즘 들어 부쩍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 꿈에서 아버지의 소지품까지 등장한 걸까.


작은 배 한 척에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을 다 걸고 바다로 나가셨던 아버지.

이미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위해 일 년에 단 며칠은 왕처럼 고고한 모습으로 '모자'를 쓰셨던 아버지.

물질의 풍요 시대를 살아가는 내게 아버지의 모자 만큼 귀한 물건이 하나라도 있는 지, 문득 생각하니 헛헛하다.


그때 아버지를 따라 걷던 자갈투성이 흙길은 신작로가 된 지 오래.

지금도 한실 고갯마루에 앉으면, 바람에 빙글빙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중절모자가 눈가에 맴돈다.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어섰지만 아직도 내 눈 앞에서는 바람에 실려 먼 바다로 날아가던 '아버지의 왕관'이 손에 닿을 듯 생생하다.



'아버지! 

오늘은 어느 하늘에서 은회색 왕관을 쓰고 계시는지요?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 그립습니다.'


2007년 문예지, <글향기> 게재, '나를 깨우는 낮잠'. 원제 : '모자'(제 10회 서울시 여성백일장 수상작) 



이미지 출처

표제: Pixabay S. Hermann & F. Richter

본문 1: PixabayGeewon Jung

본문 2: Pixabay용한 배

본문 3:Pixabay, Nicky ❤️���❤️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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