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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얌 Aug 22. 2022

바다에서 중요한 두 가지

어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입질'과 '여'이다.

철썩철썩 파도가 친다.

수평선에서 하얗게 멍석말이로 밀려오는 파도를 본다. 갯내음이 쌉싸래하다. 간간이 떠 있는 조각배들은 갓 돌 지난 아이 걸음마로 흔들고, 그 위로 갈매기가 빙빙 포물선을 그린다. 방축(방죽의 원래 말) 밑엔 이제 막 숨가삐 닿은 저인망 어선에서 물고기가 살려달라 나부댄다. 비닐 앞치마를 입은 어부들이 일렬로 그물에서 툭툭 은빛 전어를 털고 있다. 그들의 팔뚝에서 튀어나온 혈관들의 노고인 합창, '어부가'는 오늘따라 갈매기 울음 보다 슬프다.


일제강점기,

아버지는 아홉 식구의 장남이란 멍에를 지고, 열두 살에 일본 배에 올랐다. 한 열흘 뱃멀미로 정신까지 혼미해진 그를 보다 못한 선원이 끓인 쌀죽 한 그릇은 특효약이 되었다. 정신을 차려 노(櫓)를 잡은 그날로, 뱃일 잘 한다고 추기는 일본 선주의 상금, 상발은 팔 년 만에 '어부'라는 수식어로 아버지의 천직(天職)이 되었다.


당신이 돌아가신 지 어느덧 삼십여 년,

딸이 당신의 나이가 되어 고향 바닷가에 섰다. 옛 시간을 거슬러 온 짙푸른 물결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결결이 금실수 무늬가 곱다. 아련한 먼 바다에서 흰 돛단 통구밍이(작은 목선)가 보인다. 내 눈의 동공이 바다가 된다. 아버지의 노 젓는 모습이 물 위에 하늘거린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 방학, 물고기를 낚고 싶어 아버지를 졸라 배에 올랐다. 그때는 여자가 배를 타는 것이 허물이 되어 나는 남장을 했다.


기계선이 없던 시절, 조각배로 당신 혼자서 노(櫓)를 저어 통영서 욕지섬까지는 이틀이 걸렸다. 그때 캄캄한 밤바다에 사그락사그락 물살을 가르는 노 젓는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욕지섬에 도착한 새벽, 망망대해는 아버지의 품같이 넓었다. 잠에서 깬 것은 해질 무렵, 아버지는 이때가 간 개미(해질 무렵, 물고기가 입질하는 시간)라며 노를 빠르게 저어 '여'(암초)를 찾아 닻줄을 세 개나 뻗쳐 배를 고정시켰다.


'여'를 찾을 때, 산 그림자로 가늠하여 노발로 한 발 두 발 세면서, 당신만의 '여'를 찾는다며 뿌듯해하실 때, 어린 나는 당신의 어깨가 그렇게 넓고 크게 보였던 생각이 난다.


바다에 낚싯줄을 던진 한참 후, 드디어, 심줄 타래가 흔들렸다.


  "큰 고기가 물었다! 고기의 힘을 빼야 해!"


하며 심줄을 늘이면서 시간을 끌었다.


한 삼십 분 지나 물고기 머리가 보였다. 은빛 빨간 큰 도미였다. 고기를 들고 엄청 기뻐하셨던 당신! 물 간에 들어간 고기들이 제집인 양 헤엄치는 물간은 조그만 구멍을 철사로 얽어 바닷물이 넘실거렸다.


한 보름이 지나자 우리 배 안의 '물 칸'마다 오색 고기들로 가득했다. '물 칸'은 배 안에 고기를 넣어두는 곳이다. 바닷물이 들고나고해서 활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볼락어,놀래미,수밍어,우럭,삼벵이,농어,도미가 가득한 곳. 바다는 이렇게 당신의 보물창고였다.


나는 그때 알았다. '어부'의 철학을.
하루에 두 번
고기들이 '입질'할 때를 맞추는 일,
그리고 '여(암초)'를 찾는 일이다!

'입질'은 '타이밍'이요
'여'는 '위기이거나 기회'이다.
 
타이타닉이 충돌한 것이
바다 속의 빙산이었듯
배들에게 가장 위험한 것도
숨은 '여'이다.

하지만 '여'를 알아보고
닻을 내린 배에는 행운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느 석공이 '돌부처'를 만들 때의 말이 생각난다. 돌을 쪼는 게 아니라 돌 안에 있는 '부처'를 만나는 것이라고 했던가? 오늘은 유난히 하늘과 맞닿은 바다에서 어릴 적 아버지와 하루의 경험이 그리워진다. 내 삶의 신호등이자 나의 길이 된 바닷길.


눈을 뜨니 새벽 두 시, 비몽사몽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무뎌진다.


아버지의 '어부가'를 너무 가볍게 여긴 딸의 어리석은 욕심일까요?

당신이 보고 싶은 이 시간,

'입질'과 '여'를 알아야 진정한 어부다! 하시던 아버지.

망망대해에서 저는 '글감'이라는 물고기를 하나씩 낚아올립니다.

'입질'은 제게'영감'이고 '여'는 '글 쓰기를 방해하는 제 무의식'이겠지요.

어릴 적, 아버지와 배를 탔던 저는 이제 혼자입니다.

이제서야 저는 조금씩 '어부의 철학'을 체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언제까지나 제게 큰 물고기이십니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글쓰는 할머니, 구하나

: 손자들을 키우러 상경했다 60에 여고 입학, 70에 국문과에 입학, 팔십대인 지금까지 팔팔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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