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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볕 냄새 Nov 10. 2023

위선에 대한 혐오와 자기 긍정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는 꽤 잘 나가는 직업에, 그럴듯한 아내와 결혼해 아이들까지 남부럽지 않은 가정과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몸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그냥 가벼운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심해진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리치는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그는 누구든 붙잡고 울고 싶었다.

누가 자신을 아이처럼 돌봐주길 바랐다.

무척 외로웠다.


하지만 아내도, 아이들도, 친구도 그에겐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실을 감추고 외면하고 있다. 모두 일리치가 곧 죽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뻔한 말로 그를 위로한다. 그는 그런 그들이 역겹고 싫다.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자신도 진심, 그러니까 그 안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그를 둘러싼 모든 이들이 가장 무도회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일리치를 위한 것이었다 해도, 일리치는 그런 거짓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일리치에게 진실을 말하는 이는 단 한 사람, 젊은 하인 게라심뿐이었다. 성실하고 우직하며, 따뜻한 마음을 지닌 게라심은 일리치의 마음을 위로하는 단 한 사람이다. 자신의 몸이 쇠약해지거나 아프면 젊고 건강한 사람에게 묘한 질투심이 일기도 하는데, 일리치도 그랬다. 그러나 그는 게라심에게만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게라심은 인간은 누구나 나이가 들고, 아프고, 죽게 된다고 말하며 죽음을 앞둔 아픈 사람을 위해 병수발을 들어주는 게 무슨 대수로운 일이냐고 되묻는다. 자신도 나이가 들면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될 거라고. 그러니 조금도 미안해 하지 말라며 기꺼이, 정말로 기꺼이 일리치의 수발을 들어준다. 병이 든 뒤로 짜증이 늘어난 일리치라 해도 그런 게라심에게는 조금도 질투나 원망의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너무 아프니까 밤에 같이 있어 달라고 나약한 모습을 내비치며 부탁한다.  다른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는 오히려 괜찮은 척, 했던 일리치였다.


그런데 일리치는 왜 이다지도 거짓을 혐오하는 것일까?

사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일리치에게 한 거짓말은 통념상 '하얀 거짓말'에 가깝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에게 곧이 곧대로 당신은 언제 죽을 것이다, 당신의 병은 절대 나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 해도, 잘 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고, 비난받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러니 일리치가 거짓말을 혐오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거짓'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 ‘거짓' 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일리치를 건드린 게 아닐까.


하나는 자신,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의심, 혐오가 있다.

우선 일리치 본인이 그동안 진실한 삶을 살아왔는가, 하면 선뜻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렵다. 물론 그가 반사회적 행동을 하거나 엄청난 잘못을 하고 숨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알려 하지 않은 채, 세상이 세워놓은 기준에 맞춰 인생을 살아왔다. 겉으로 보기에 그럴 듯해 보이는 직업, 많이 사랑하지 않지만 그럭저럭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아내와의 결혼, 집과 친구들 ...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선택해왔다. 그리고 이 중병에 걸리기 전까지 그런 삶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꽤 만족해하며 살았다.


죽을 병에 걸린 뒤에 자신을 정성껏 돌보거나 위로하지 않는 아내에게 서운함을 느낀다지만, 어쩌면 그것은 일리치 스스로가 만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라고 해서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을까? 적당한 정도의 조건에 부합하는 여자로서 자신을 선택하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아내의 '역할'만을 찾았던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려면 그 아내는 얼마나 마음이 넓어야 하는 걸까. 거꾸로 부인이 죽을 병에 걸렸다면 일리치는 어떻게 했을까? 일리치가 거짓을 혐오하게 된 것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그간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진짜 자신으로 살아보지 못한 채 그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두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과 분노를 가족들에게 돌리다가, 마지막 눈 감는 순간에서야 그것이 그들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게 된 게 아닐까.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기 자신이 되었고, 부인과 친구들을 탓하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또 하나는 가족과  친구들의 "괜찮을 거예요, 곧 나을 거예요"가 책임과 헌신의 회피에서 비롯된 거짓말임을 직관적으로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상황이 안 좋은 사람에게 "괜챃아"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한 쪽은 괜찮다고 하면서 내가 곁에서 돕겠다거나 힘이 되겠다는 사람, 다른 한 쪽은 괜찮으니까(나는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네가 알아서 하라는 사람. 안타깝게도 후자의 경우에 가까운 사람이 해당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상대의 고통과 어려운 상황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 책임이 버거워 도망가버리는 전략으로 '괜찮다'는 말을 쓰는 것이다.


만약 게라심이 주인님은 나을 수 있어요, 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일리치는 그의 거짓말을 이토록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거짓말 뒤에 담긴 진심이 책임과 불편함의 회피가 아니라, 진짜 자신을 격려하고 싶어서였다면 아무리 정직이 최우선!이라는 사람이라 해도 상대를 미워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안쓰럽고 미안하겠지.


일리치는 거짓말,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를 둘러싼 인간의 '위선'에 혐오를 느꼈던 것 같다. 아내가 "당신은 죽을 병에 걸렸어요. 그런데 나는 당신 병간호는 못하겠어요. 아파서 힘든 거 알지만 나도 너무 힘들고 무서워요."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화도 나고 서운하기야 했겠지만, 그 심정 또한 이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 사실은 그들 자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일리치를 위하는 척 한 게 그의 마음 한 구석을 건드렸던 것이 아닐까.       


당신은 위선자야!


위선을 좋은 것이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위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쁜 것이라 해도 솔직한 욕구와 마음을 말하지, 왜 위선을 떠느냐고 할 수 있다.

맞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리치가 가족들을 미워하는 것도 이해할 법한 일이다.



하지만 일리치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포함해 인간의 모순됨과 나약함을 이해했던 것 같다.


어디선가에서 그랬다.

우리는 '긍정'이라는 말을 오해해서 많이 쓰는데, 그것은 '잘 될 거야'라는 식의 희망찬 태도를 의미하는 게 아니란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게 긍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리치가 주변 사람들의 거짓과 위선을 미워했던 것은 그 자신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발버둥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이 거짓투성이였다는 것,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자신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침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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