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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림 Mar 14. 2024

본 때의 맛

기다려주지 않는 것, 기다려야만 하는 것들에 관해.

섞박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송추에서 농사를 짓는 외삼촌 댁에서 김장과 함께 보내온 섞박지를 먹었을 때, 어찌나 띠 용한 맛이었는지! 이제 송추의 외삼촌은 그렇게까지 김장을 크게 하지 않는다. 가족의 스케줄을 맞추기도 어렵거니와, 몇백 포기씩 되는 배추를 밭에서 뽑아다 다듬고 절여 앞마당에서 크게 김장을 하는 품을 들여야 만들어지는 김치는 맛은 있어도 모두에게 큰 부담이기 때문이다. 맛있는 김장김치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그 시절의 기억만 남겨두고 떠나가버렸다.


가끔 시원하고 아삭한 맛이 그리워지면 섞박지가 생각난다. 아마 지난여름쯤, 그래서 인터넷에서 섞박지를 10킬로나 시켰던 적이 있다. 10킬로라도 나는 금방 먹을 수 있어! 하는 집밥쟁이의 깡으로 시켰는데, 그럭저럭 맛은 있었지만 외삼촌 댁에서 온 그 맛이 아니었다. 아직 맛이 덜 들어서 그런 걸까. 조금 더 익혀서 먹으려다가 틈틈이 맛없음을 감내하며 먹는 사이 조금 남은 섞박지가 냉장고 한편에서 잊혔다.


그다지 중간맛 섞박지는 시간을 들여 기다려도 아주 맛있어지진 않았다.


혼살림에 나름 큰 김치통에 담겨 있던 섞박지의 존재를 다시 떠올렸다. 페북에서 지인의 고등어 대신 캔참치를 쓴 무조림 레시피를 보고서 퍼뜩. 섞박지를 무 대신 써보면 어떨까.


묵어버려 시어지다 못해 군내가 나는 김치 양념을 깨끗이 씻어내고 짠지가 되어버린 무를 참기름에 한번 더 달달 볶았다. 묵은지의 맛을 더 맛있게 끌어올리고 잡내를 잡기 위해 다진 마늘을 듬뿍 넣었다. 대파를 송송 썰고 참치캔을 세 캔이나 털어 널었다. 간장 한 스푼, 아니 두 스푼, 설탕 대신 알룰로오스 두 바퀴, 청양 고춧가루 크게 한 스푼. 양념장 레시피는 늘 내 맘대로다. 한 시간 여 푹푹 조리고 나니 약간 묵은 내가 나긴 하지만 그럭저럭 고소하고 달큼한 무조림이 만들어졌다. 도무지 먹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묵은 섞박지를 얼추 살렸다.


금방 밥 한 공기를 뚝딱 했다. 신기했다. 그리고 다음날,

하루가 지난 무조림을 데웠다. 웬걸? 묵은지 군내가 싹 사라지고 세상 맛있는, 하루의 시간 동안 더 감칠맛이 우러난 무조림이 만들어졌다. ‘진짜 맛은 이제부터다!’ 하고 혀끝에서 위장까지 부담 없이 부드럽게, 온몸 구석구석 아주 본때를 보여주는 맛이다.


가장 탁월하다고 믿었던 것 마저, 조금 기다리면 더욱 탁월하게, 마치 내가 탁월함의 정점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주 우습게, 본연의 “본때”가 드러나는 때가 있다. 머리로 아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아주 아주, 일부다.


매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송추 외삼촌 댁 김치와, 어젯밤, 조왕신의 도움으로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진 무조림이 하루하루를 사는 내게 “때”를 가르쳐준다. 언제나 그 본때가 언제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하루하루 이때가 본 때인양 정성껏 살 수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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