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면서 시작된 내 생활의 터전은 어쩌다 보니 방위산업근무의 옆지기 덕에 저 먼 광양에서 시작되더니 서울 시댁을 거쳐 다시 일본 센다이로, 다시 밀레니엄 시대에 시댁 옆 서울로 ,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40대 후반에 저 먼 미국 땅 미시간까지 이사를 해야 했던 나.
그러다 보니 어쩌다 유럽까지 참 많이도 돌아다녔던 시절들이 있었다.
내가 대학시절 교생실습을 잘 마쳤었더라면 , 교직을 시작했을 테고, 그랬더라면 지금의 옆지기를 따라 지방 , 해외를 돌아다닐 일은 아마 없었을지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대학 4학년 때 모교는 100주년 기념행사로 오페라를 해야 했고 그 이유로 우리의 교생실습은 허락되지 않았던 내게 첫 암담한 시기가 있었다.
음대라는 이유로 머리 나쁘다, 공부 못한다 소리를 듣기 싫었던 나는 커다란 가방에 도시락을 두 개씩 싸들고 대학이란 곳을 다녔다.
어떤 여학생들 처럼 달랑 핸드백을 메고 다녀 본 적은 글쎄 손가락을 세어보려 해도 없었던 듯?
아무튼지 그렇게 악바리로 교생 과목들까지 성적을 따냈었는데.. 100주년 행사 연습으로 그 아름다울 교생실습의 시간을 놓쳐버렸었던 쓰라린 기억 ( 그때 학생들이 참 착했었다는 아니 무지했었다는 생각도 든다. 왜 교수님들께 항의 한 번 못 했었을까?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네게 스승님은 하늘 같았던 시절이었다로 치부해버릴까?...)
그래서 지금의 옆지기를 따라 광양 , 센다이, 서울, 미국 등... 을 돌게 됐는지도..
어쩌면 선생님이란 직업보다 지금의 내가 더 넓은 시야의 소유자가 되었으니 더 행복할 일인지도로...
아무튼 이야기가 옆길로 새 버렸지만..
TV 속의 아프리카는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인 곳으로 오래전부터 남아있는 곳이다.
모 이제 오십 대 후반으로 곧 들어서니 낭만보다는 현실이 우선이지만 ,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 맑은 밤하늘의 별이 빛남을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선망의 장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