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에서 구리까지 엄마를 챙기러 오가는 길도 멀었고, 일도 하던 차라 그냥 가볍게 들여다볻놓아버렸던.
올 정월 뒤 동경 미술관 투어 안내 후 코로나의 확산으로 멍하게 지내다 일본어 식탁 요리교실 수제자님의 연락에 어르신 입주 음식 케어를 한 달 하곤 사택의 옆지기와 독립했다 집으로 귀환한 장남과 미국서 마지막 학기 중인 막내의 귀국. 자가격리를 거쳐 수지 집 두 순데를 오가며 식사를 챙기다 보니 여름도 훌쩍 지나버리던 즈음,
다시 알바 자리와 함께 인터넷 강의를 신청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음악도 였다.
석사과정은 음악학까지 열심히 공부했던..
대학 일 학년부터 시작했던 랫슨도.. 사십 대 후반 미국으로 이사하며 일어과 외도, 요리교실도 , 랫슨도 다 놓아버렸었다.
그리고 귀국해보니 내 나이 어느덧 오십하고도 중반.
한 자리에서 꾸준히 일을 한 것도 아니니...
그러다 이어진 셰프와 요리교실...
그렇다고 음악을 아예 놓아버린 적은 없었다.
어쩌다 일본어 예배부의 성가대 지휘로 작년엔 후쿠오카로 찬양선교도 다녀오고 , 홋카이도 외삼촌 교회로 음식 반주 봉사도 다녀왔었다.
심리치료에 대한 궁금증은 항상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올봄의 무료하고 공포스러웠던 그래서 멍하게 보내버린 시간들에 대한 나 나름의 보상방법이랄까?
아무튼 그렇게 늦여름부터 시작된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것이 실은 체력적으로나 , 시간적으로나 만만치는 않았다.
난 원래 내 나이보다 구식이다.
신혼초엔 풀을 먹여 이불 홑청을 꿰맸고 , 두 사내놈들도 천 기저귀를 사용했고 , 젖을 물렸고 , 오일 장에서 독을 사다 김치도 담그고 , 엄마와 고추장 된장도 만들고, 유자도 절이고 매실청도 담갔었다. 그 희미한 1990년대부터 말이다.
아무튼 오랜만의 강의는 더 더우기 음악과 관련된 내용은 무척이나 흥미로왔고 , 난 교제를 사용치 않고 직접 필사를 하고 , 다시 노트 정리를 하고 , 오답 공책도 만들며 세 번에 걸친 공책을 완성했다.
오른손 엄지 손가락의 아픔도 잊은 채..
실인즉, 자격시험까지가 목표는 아니었다. 그 과정과 시간을 배분하는 게 흥미로웠을 뿐..
그러다가 2급 자격증 시험을 보았고 , 생각보다 쉽게 점술 따냈다. 그러고 나니 결국 1급 시험까지..
맘은 좀 조급했다.
주 삼일의 알바와 장남의 이른 새벽 출근의 도시락도 싸가며 내 시간을 쪼개 노트와 볼펜으로...
특히나 중추절 앞이 시험기간이라..
아무튼지 오랜만에 자격증 하나를 획득했다.
어디를 취업하기 위한 목표도 없었다.
요즘 같은 코로나 시기에 청년들도 취업하기 힘든 상황에서.. 나 같은 오십 대 중반에서 곧 후반으로 넘어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