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목표는 블랙티라떼처럼 완주하는 것.
"한 발짝만 들어서면 사정없는 가정 하나 없어."
자주 들르던 커피숍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신랑과 연애 때부터 자주 들르던 아지트 같은 곳.
지금은 친정이 된 옛 우리 집 버스정류장 앞에
꼭 다방 같은 커피숍이 하나 있었다.
그땐 동네에 커피숍도 몇 군에 없고(지금은 우후죽순)
그마저도 일찍 문을 닫았기 때문에
집까지 바래다준 그 당시 남자친구였던 신랑과
헤어지기 아쉬워 '조금만 더'를 위해
들어가게 된 커피숍이었다.
"어서 오세요."
"음... 그냥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그 흔한 인테리어도 꽝인데다
사장님도 우리 엄마와 같은 연배에
뭔가 젊은 사람들의 취향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그런 곳이기에 커피 맛에 기대도 없었다.
(사실 커피 맛도 모르는 분위기 맛이 중요한 나이였다.)
"저... 이번에 새로 넣은 메뉴인데 한번 잡숴봐요."
"어머... 이게 뭐예요?"
"블랙티라떼예요."
"아 저희 그냥 아메리카노로 충분한데..."
"입에 안 맞으면 남겨도 좋으니 마셔봐요."
우린 한 입씩 맛을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장님의 따뜻함이 고스란히 담겨서일까?
부드럽고 달콤하면서 뭔 지모를 깊이감과 향이 느껴지는
블랙티라떼는 그 곳을 우리만의 아지트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후, 우리는 블랙티라떼 커플이 될 정도로
그 곳에 갈 때마다 주문은 무조건 블랙티라떼였고
그렇게 자주 찾게 된 커피숍의 사장님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많은 이야기, 많은 고민을 털어놓는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몇 해가 흘러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가 되었는데
한창 결혼 진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정말 이 결혼을 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여러 가지 의문과 불안이 눈덩이처럼 커져갔고
주변에 성공한 결혼생활을 부러워하거나
'실패한 결혼생활이 나의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를 반복하며 초조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답답한 마음에 커피숍 사장님을 찾았다.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는 없고
친구와 나누기엔 결혼했다고 해 봐야 겨우 신혼인 그들이었기에...
좋은 어른의 현실적인 충고가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사장님. 저 오빠랑 결혼해도 될까요?
제가 사장님의 딸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하실 것 같아요?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일생일대의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를
아무리 가까워진 관계라고는 하나
냉정히 남일 수밖에 없는
커피숍 사장님께 물었다는 것 자체가
참 순진하고 어렸구나 싶다.
하지만 그 순간 질문한 근본적인 이유를
지금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인생을 좀 아시는 어른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안전장치 없이 현실로 뛰어들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확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확신이라는 것이 스스로 하는 것이고
당사자가 서로에게 심어주는 것인데
그때 자기 확신도, 상대에 대한 믿음도
부족했던 것 같다.
다소 황당한 질문을 받은 사장님은
이미 머릿속에 저만의 결혼에 대한 정답을 그리고 있는
예비신부의 눈을 한참을 보시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셨다.
"한 발짝만 들어서면 사정없는 가정 하나 없어."
결혼해도 되겠냐는 질문에
뭔가 딱 떨어지는 답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만큼 정확한 답은 없다는 것을 안다.
이미 결혼을 결심한 신부가 묻는 질문에
결혼을 하고말고의 선택보다는
그 후 결혼생활을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고
어느 곳에도 완벽한 결혼생활은 없기 때문에
혹여나 완벽을 꿈꾸는 예비신부가 현실과 만났을 때
좌절하고 포기하지는 않을까 우려하셨던 것 같다.
요즘같이 SNS가 발달한 사회는
온라인에서는 행복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오프라인에서는 그만큼 불행한 사람이 넘치는 것 같다.
모두가 인생의 행복한 정점을 잘 포장해서 노출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돌아서 비교적 초라한 자신의 삶에 좌절을 한다.
(SNS의 모든 정보가 왜곡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 또한 이 두 가지 경우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사장님이 우려하셨듯 기대하던 결혼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고
우리 부부는 사이가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정말 극과 극을 달린다.
연애 기간이 길었고 자주 다투는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혼해서 특별히 부딪힐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단단한 착각이었다.
하나에서 열 가지 몽땅 다른 남자와 여자일 뿐이었다.
며칠 전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르고 마음이 상한 채로
핸드폰 뉴스를 보던 중에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정말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동시에 지지하던 공인커플의 결혼이
끝내 파경으로 이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다소곳하고 살림까지 잘하는 데 미모까지 겸비한 여자와
아이들을 잘 챙기고 경제적으로도 든든한 능력을 보이는 남자의
결혼생활은 대리만족을 주었었다.
그런데 이혼이라니...
그 순간 내면의 사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다 더 한 상황을 맞이한 그들의 이혼을 고소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장 그들보다는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내 삶에 안도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 찰나 사장님이 하신 간결한 한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한 발짝만 들어서면 사정없는 가정 하나 없어."
그리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다른 이의 행복은 어차피 내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이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고로 내 행복 또한 자랑하고 포장한다고 해서 더 커지지도 않고
남이 오해하거나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것.
무엇보다 완전하고 완벽한 결혼생활은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
이렇게 또 한 뼘 자라나 보다...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하지 않는가!
결혼이 곧 인생에 속하였으니 이 또한 마라톤!
엎어지고 상처 나고 지치고...
때론 다른 이들보다 뒤쳐지고
또 앞서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뛰고 있다는 사실과 완주해 내는 것,
그리고 그 완주를 이뤄내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
역시 오늘도 부엌에 선 새댁은
부드럽고 달콤 쌉싸름한 블랙티라떼와 같은
깊은 향과 맛을 품은 인생으로 완주하길 기대하며
오늘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