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로3가 183
반드시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고 늘 되뇌면서도 사실은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 지난주에는 어떤 사이트에 가입을 하려는데 소속을 적는 칸이 있는 거야. 필수 항목이 아니라 그냥 지나쳐도 되는데도 빈칸 위에서 깜박이는 커서를 한참이나 바라보며 손톱을 깨물고 있었어. 그러고 나서 이렇게 적었다. ‘나와 나 자신’
그 사이트 관리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꼼꼼한 사람이라면 그걸 보게 됐을 텐데,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넘겨짚게 되려나? 어쨌든 내 가입은 무사히 승낙됐고, 그 덕인지 내가 오롯이 나와 나 자신에게 속해있다는 것도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어. 네가 이 얘기를 들으면 피식 웃으면서 “유난 떨었네?” 하겠지?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평소처럼 말을 이어갈 거고.
확실히 ‘나’와 ‘나 자신’은 서로 다른 형태처럼 느껴져. ‘나’라고 해버리면 내 선택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나를 둘러싼, 혹은 나를 채운 것들을 다 뭉뚱그린 덩어리가 떠오르거든. 그게 싫다는 건 아니고. ‘나 자신’은 그보단 희미하긴 해도 번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나는 아직 ‘너 자신’을 만나본 적은 몇 번 없는지도 모르겠다. ‘너’야 나도 이제 좀 알지. 그중에는 ‘나’도 있는 거잖아.
우리는 약속을 잡을 때 만나서 뭘 먹을지 치밀하게 고민을 하는 편이잖아. 그러다 너의 재밌는 말버릇을 알았어. 너는 줄곧 음식 이름 앞에 ‘춘천식’을 붙인다. 춘천식 라멘, 춘천식 카레, 춘천식 떡볶이, 또 설날에는 춘천식 홍삼 선물 세트를 사러 간댔나. 틀린 말도 아니니까 나는 잠자코 들으면서 그 음식들 위에 춘천식 밥상보가 덮여있는 상상을 하고는 웃었어.
오늘은 아침에 눈을 채 뜨기도 전에 햄버거가 먹고 싶은 거야. 귀여운 참깨빵을 찬장에 가득 쌓아놓고 매일 다른 토핑으로 햄버거를 만들어 먹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잠깐 생각하다 밥상보 같은 이불을 얼른 들추고 일어나 “진아의 집”에 갔어. 춘천식 수제버거를 파는 곳이라고 네가 알려준 곳 말이야. 고등학교 때 관악부 합주 끝나고 많이 가던 데라면서 은근슬쩍 관악부 활동했던 것도 자랑했지.
가게 앞 창문으로 사장님이 철판 위에다 패티 구우시는 걸 보고 있었는데 바깥에 있는 의자에서 담배를 태우시던 할아버지가 여기 햄버거가 40년 전통이라고 하시더라. 햄버거랑 전통이라는 말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러냐고 했어. 춘천에 미군 부대가 있고 이 주변으로는 기지촌이 형성되어 있을 적부터 지금이랑 똑같은 모양으로 수제버거를 만들어 팔았대. 나는 괜히 눈썹을 들어 올리고 입은 오므린 채 놀란 척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어. 할아버지가 어깨와 고개를 동시에 으쓱하더니 담배 든 손으로 들어가 먹어보라는 손짓을 하시기에 ‘네네 그래야겠네요’ 하면서 들어왔지. 나는 원래 여기 올 생각으로 가게 앞까지 온 거지만 말이야.
40년 전통의 춘천식 수제버거를 시켜놓고 앉아서 주변을 기웃거렸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붙였다 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낡은 의자와 빈틈없이 낙서로 가득 찬 벽이 보이더라고. ‘누구누구 왔다 감’, ‘아무개♡아무개’, ‘우리 팸 우정 영원히’. 사람들이 왜 자꾸 벽이나 돌에다 이런 걸 적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질문에 김영하 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아도 사랑도 모두 불안정하니까 안정돼 보이는 곳에 새기는 거라고. 소설가의 말을 곱씹는 사이 어쩐지 절박해 보이는 낙서벽을 40년 넘게 지켜낸 사장님이 햄버거를 가져다주셨다.
무심하게 툭 내려놓고 가신 직사각형의 하얀 접시에는 접시 크기에 걸맞게 자른 포일이 깔려있었는데 그 위의 햄버거는 꽤나 안정돼 보이더라. 버터 바른 철판에 한번 더 구웠는지 참깨빵은 반질반질하니 노릇하고 양파와 케첩이 흘러넘쳐있어. 치즈버거로 주문한 것 같은데 치즈는 안 보이는 걸 보니 잊어버리셨나 봐. 나는 이럴 때 잘 얘기하지 못하고 주는 대로 먹는 편이잖아, 치즈가 없는 치즈버거니까 재밌다고 생각하면서. 제 속을 채우는 것들로 이름 불리는 음식들이 멋지다고 생각해. 내가 음식이었다면 뭐라 불렸으려나.
여기 말이야, 나도 중학교 때부터 다니던 이런 가게가 있어. 간판에 경양식집이라고 쓰여있는 바람에 내게는 덜컥 경양식의 기준이 되어준 집이야. 친구들이랑 시험이 끝난 날에 가벼운 책가방을 어깨에 걸쳐 메고 치즈 돈가스나 토마토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지. 치즈 돈가스는 손바닥 만한 돈가스 두 덩이에 피자치즈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조금 얹어준 게 전부였고, 토마토 스파게티도 면과 소스가 제각각이었지만 우리는 항상 맛있게 먹었어.
가진 게 별로 없으니까 잃을 것도 없던 시절에 만난 친구들이 요새 들어 특별하게 느껴져. 어릴 때 기준도 조건도 없이 사귄 친구들 말이야. 대개는 집이 같은 방향이거나, 한 반에서 출석번호나 책걸상이 가까운 애들이었지. 어른이 되고서는 사람들을 걸러서 사귀게 된 것 같아. 나랑 하는 일이 비슷한 사람, 취향이 잘 맞는 사람, 어쩌다 동시에 같은 걸 싫어하게 된 사람. 그래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들 있잖아. 그런 사람들과 밤이 새는 줄도 모르게 떠들고 어울리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는 너도 잘 알지.
그러다 동네에서 함께 나고 자란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친구가 서운한 티를 내더라. 얼굴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고, 요즘 내가 뭘 하고 다니는지 내 SNS를 보고 확인한다고. 그즈음에 드문드문 만났던 소꿉친구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얘기를 했어.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전부 섭섭한 기색이 느껴졌지. 알았어 알았어 하면서도 20대에 막 들어서 오만이 가득했던 나는 그걸 다 흘려들은 것 같아.
유년과 학창시절을 함께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걔네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 데에는 그로부터도 몇 년이 더 걸렸다. 골라 사귄 이들이 곧잘 스쳐 가고,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국면들을 맞닥뜨린 뒤에야 알아챘으니까 어쩌면 나는 여전히 이기적인지도 몰라. 그래도 바랄 것 없이 친구가 된 애들은 여전히 날 미워하지 않고 떡볶이나 돈가스, 햄버거 같은 게 먹고 싶을 때 뛰쳐나와 앞에 앉아줘.
우리 서로의 오래된 친구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아직도 한 데 모여 게임을 한다는 너희들의 유치찬란한 게임 ID를 듣고 나는 얼마나 웃었던지. 대체로 근화동 쌍도끼, 슈퍼집 막내아들 이런 식이었는데 유독 한 친구만 건전하지 못한 ID를 가지고 있었잖아. 나도 친구들이랑 서로를 부르는 별명이 있어. 유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름들이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것, 어떻게든 아로새기는 것, 어딘가에 속해지는 것, 그런 것들이 모여 우리를 만들어가는 거겠지? 항상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 나 자신을 잃을까 두려워 아등바등하던 시절은 용케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묵혀둔 관계들 속에서 적당한 내 자리를 찾아가고 있어. 오래된 장소에서 숱한 시간을 견뎌 제 자리를 지켜온 음식이나 의자, 벽 같은 걸 보며 위안을 얻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다음에 여기 오면 여기 어디쯤 우리의 오늘도 새겨보자. 그럼 넌 또 유난 떤다고 할 테고 나는 그러든가 말든가 하며 낙서를 하곤 물만두를 시킬 거야. 갑자기 웬 물만두냐고? 여기 물만두의 영어 이름이 정말 재밌거든. 단돈 2,000원 하는 WATER MANDOO.
- 저마다의 이름이 머물러있는, 진아의 집에서
https://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30436829
* 이 원고는 2018年 어반플레이 웹매거진에 '춘천 음악기행' 시리즈로 기고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