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가 맘에 들지 않을 때 R&R을 직접 설계하는 방법
2019년 1월, 내게 회사 생활에서 꽤나 잊기 어려운 몇 순간 중 한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바로 내가 '고객센터 관리업무'를 맡게 된 날이다.
대기업의 경우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자신이 하고 싶은 업무를 하기란 어렵다. 직무의 특수성이 높거나 해외 비즈니스를 담당하기 위해 특기자로 뽑히지 않은 이상 문과생들의 인사배치는 대개 인사팀의 의도대로 이뤄지기 마련이다.
홈쇼핑으로의 입사 목적은 'MD'였다. 마케팅과 전략 기획을 천직으로 알고 다양한 공모전과 인턴경험을 했지만 이것이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적당한 트렌드 감각과 여러 내부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며 고객의 니즈를 반영한 상품 런칭을 통해 히트 상품 연쇄 기라는 직무가 내 첫 커리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MD를 꿈꿨다. 홈쇼핑 입사 전, 유통사 이력이 없던 관계로 급하게 글로벌 유통 플랫폼 회사의 인턴까지 경험하며 '누가 봐도 난 MD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일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입사 후 배치는 CS팀이었다. 상담업무? 고객보호? 뭐하는 부서인지 이해도 어려웠던 입사 1년 차는 어드민과 플랫폼 기획자로 정신없이 지냈다. 그리고 그 무렵 '그래 난 이제 서비스 기획 자오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겨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입사 2년 차인 2019년, 그렇게 난생 첨 보는 옆 파트인 '고객센터 관리'라는 파트로 업무가 변경되었다.
일반적인 고객센터 관리자의 업무는 콜센터를 운영하는 업무에 초점이 맞추어줘 있다. 아웃소싱 업체인 콜센터의 협력사를 관리하고 상담사의 고객 문의 처리 증대와 상담 품질 강화를 위해 협력사와 함께 여러 관리 지표를 설정하고 이것을 점검한다. 때문에 인사업무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고, 루틴 하게 돌아가는 고객센터의 다양한 지표를 확인하며 오직 '사람'이 중심이 되는 현장의 특성상 돌발 이슈들까지 케어한다.
문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다. 이 팀에 처음 발령받고 나서 사용자의 반응을 일일이 확인하고 가설 검증 과정을 통해 기획 업무의 열의를 상승시키고 싶었던 나의 생각은 욕심이 되어버렸다. 플랫폼 및 어드민 기획을 담당하면서 어렵고 모르지만, 이 업무에 정을 붙인다면 엠디가 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만 있을 것 같았다. 그에 반해 고객센터 업무는 티 안 나는 업무였다. 당시 나의 짧은 식견으로 이 업무는 영업이나 서비스 기획의 분야처럼 고객 반응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업무였거니와 협력사와 콜센터 관리자를 상대하며 수없이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 커뮤니케이션에서 인하우스에 속산 나는 센터 관리자로써 성과를 닦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불평과 불만으로 일관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 '나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면 먼저 성공하거나, 최선을 다하거나, 몸 담고 있는 그 영역에서 새롭게 생각해 성과를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 내가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부터 찾았다.
먼저 한 것은 업에 대한 재정의였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먼저 내가 맡고 있는 이 팀의 업무, 업의 본질에 대해 재정의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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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업에 대해 재정의를 내린 후, 현재 하고 있는 일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의 간극을 줄이고 교집합을 만들 수 있는지 방법을 간구했다. 때문에 팀 내 있던 파트 간의 가치 사슬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 팀은 크게 3개 파트로 이뤄져 있었는데, 소비자 보호 정책 기획과 플랫폼/서비스 기획, 그리고 고객센터 관리 파트가 있었다. 그리고 업무는 다음과 같이 이뤄진다.
1. 플랫폼/서비스 기획 : 소비자 접점 채널을 살피고 고객의 주문 경험을 극대화하고 CS문의 처리의 신속성을 위해 고객 문의가 최대한 비대면으로 빠르게 처리될 수 있도록 함.
2. 소비자 보호 정책 기획 : 매체별, 상품 유형별, 고객 불만 유형별 보상 정책들을 기획하고 민원기관으로 접수된 불만 건에 대해 소명 및 고객 보상을 담당.
3. 고객센터 관리 : 고객의 문의를 처리하기 위한 적정 상담인력 계획, 신규 온라인 몰 및 제휴몰 오픈에 따른 전담 상담원 인력 배정, 상담 생산성 및 품질 달성 KPI 관리.
그리고 여기서의 교집합은 '신규 온라인 몰 및 제휴몰 오픈'이었다. 새로운 비즈니스를 전개에 따라 신규 이커머스 몰이 오픈하게 될 경우, 이를 위한 전담 고객센터 오픈을 준비하게 되고 이는 해당 몰의 소비자 보호 정책과 적정 상담 인력 배치, 상담원이 사용하게 될 어드민 기획이라는 업무 덩어리들이 마치 팀 프로젝트처럼 합쳐졌다. 하지만 이를 주관하는 전담 파트 또는 PM이 존재하지 팀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업 팀에서 '이번에 신규 제휴몰을 오픈하려고 하는 게 어느 분과 대화하면 되나요?'라고 한다면 어떨 땐 플랫폼/서비스 기획 파트에게로, 어떨 땐 센터 관리 파트로 문의가 제각각 가고 있었다. 어찌 보면 회색지대와 같은 영역이었다.
나는 여기에 나의 기회가 있다고 판단했다. 비록 센터 관리 담당자로써 신규 몰 오픈에 필요한 상담 인력만 계산할 수 있었지만, '상담원을 가장 잘 아는 센터 관리자가 이들이 사용하는 어드민 시스템과 고객 보상 정책, 업무 프로세스 및 업무 유형별 로직을 논의하고 협의하는 것이 궁극적인 상담사의 생산성을 높이고 상담 품질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나름의 가설을 세웠다. 어드민 기획의 덩어리가 큰 신규 몰 런칭건의 경우는 플랫폼/서비스 기획 파트의 업무로 두고 매출 규모가 작거나 기존 론칭했던 몰들과 유사한 형태의 신규 몰 런칭은 나의 업무로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신규 몰 런칭은 물론 운영 및 프로세스 개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업무 R&R을 재설계하는 것이 결코 나 혼자만의 다짐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각 파트의 파트장님들의 동의가 필요했고 팀장님을 설득하는 것 또한 필요했다. 기우와 달리 아주 운 좋게 '그래 한 번 해봐'라는 파트장님들과 팀장님의 격려로 어찌보면 일을 사서한 것과 다름 없었다. 기존 업무만으로도 벅찼지만 'CS/CX를 하는 사람이 적어도 고객센터 런칭에 관해서는 A TO Z까지는 다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힘듦이 아닌 배움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자사 몰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몰을 포함해 10개가 이상의 제휴몰, 신규 몰 런칭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고객센터 오픈 및 전담 기획'이라는 업무는 나의 업무 영역에서 빠질 수 없는, 동시에 고객센터 관리파트의 존재 이유를 한 번 더 설명해주는 영역이 되어 버렸다. 운 좋게 사내에서 신규 몰 및 제휴 몰 론칭이라는 비즈니스 목표와 맞물려 어부지리로 성과를 얻은 점도 물론 있지만 서비스 기획도 하고 고객센터 관리도 하고, 동시에 소비자 보호 정책 시 고려해야 할 부분들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보면서 '고객 여정, 소비자 여정'을 기획하는데 얼마나 다양한 리소스가 투입되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결론 - 업무가 맘에 들지 않을 때 R&R을 직접 설계하는 방법
이렇게 R&R을 직접 설계하면서 얻었던 성과는 꽤 컸다. 업에 대한 애정이 생긴 것은 물론 아무리 업무가 바쁠지라도 'CS/CX' 전문가가 되어가는 하나의 트레이닝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가치 사슬을 통해 내가 팀, 회사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니 업무가 점점 재밌어졌다. 3년 차, 5년 차 등 홀수년차에 찾아온다는 매너리즘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주어질 때마다 가치 사슬을 어떻게 더 확장시켜 내 업무 R&R을 조정할 수 있을까라는 재미로 회사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R&R을 직접 설계할 수 있었던 비결을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 팀 내 또는 팀 간의 업무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이어지는지 먼저 그림으로 그려 본다.
둘, 팀 내 또는 팀 간의 업무 중 회색지대(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 지대)를 살펴보고 그곳에
본인의 업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살펴본다.
셋, 만약 회색지대가 없을 경우, 팀 내 또는 팀 간의 업무 가운데 자신의 업무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다른 업무를 살펴본다.
넷, 무작정 업무를 새로 만들기보다 본인의 업을 먼저 정의하고 그것이 나의 커리어와 사내의 비즈니스 가치,
코어 밸류와 어떻게 맞닿는지 확인한다.
다섯, 동료와 상사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 R&R이 왜 필요한지,
왜 이것을 내가 가지고 와야 하는지 설득한다.
현재 내가 속한 회사는 대기업의 전형적인 hierarchy 구조의 기능 조직으로 짜여 있지만,
업무는 마치 목적 조직, 매트릭스 조직처럼 다시 설계해서 혼자서 업무를 하고 있다.
소위 '업무의 매뉴얼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 업무 영역을 스스로 설계할 줄 아는 사람'을
유니콘 스타트업 또는 IT 대기업의 인재상으로 보고 있는데 그 말을 곱씹어 현장에서 적용해보면
아마 이런 사례가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내가 그 인재상에 부합한다는 건 절대 아니다 오해는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