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자니 꽤 두렵다. 몇 년 전 국내외로 큰 화제를 모았던 에세이를 읽어본 일이 있다. 찬 바람이 불던 어느 날이었는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에 위치한 한 서점에서였다. 나는 매달 어느 금요일 밤 공연을 예매한다. 조금 일찍 퇴근해 이른 저녁을 먹고 서점에 처박혀 한참 책을 읽다 시간에 맞춰 공연에 가곤 한다. 그날 역시 사람들이 붐비는 시간을 피해 저녁을 먹고 서점에 들렀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바로 그 화제작이었다. 재빨리 구석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책을 편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다른 책을 읽고 싶었다. 결국 3분의 1쯤 읽고 말았다. 보통은 마저 읽을 요량으로 책을 구매하는데 그날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
우선 과거의 나는 에세이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자격 미달의 책이 나오기 가장 쉬운 형태가 에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좀처럼 에세이에는 손을 대지 않는 내가 그 책을 집은 건 말 그대로 정말 화제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그 책에 대해 떠들었고 말이 많아지는 만큼 증쇄를 거듭하며 어마어마한 부수가 팔려나갔다. 제목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나는 그 책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목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내 손에 쥐어진 이 종이 덩어리는 그 어떤 울림도 주지 못했다. 그 책은 엄마와 딸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었는데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당신의 어머니가 찌개 중 어떤 찌개를 선호하는지 도대체 내가 왜 알아야 하냐고 따져 물었다.
그해 가을 나는 엄마와 딸에 관한 한 영화를 보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극장 안에는 팝콘을 든 어린 여자 둘, 젊은 여자 하나, 늙은 남자 하나, 그리고 애매하게 늙은 남자인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극장 안에서는 어린 여자의 울음소리, 젊은 여자의 울음소리, 늙은 남자의 울음소리, 애매하게 늙은 남자의 울음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나는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내 평생의 숙제가 있다면 그건 엄마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엄마와 딸에 관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모녀의 세계가 더 복잡하다고 생각한다) 늙은 남자와 나조차도 감정의 폭풍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엄마라는 존재는 모두에게 숙제인 것이다.
다시 찬 바람이 불던 이듬해 나는 문제의 화제작을 다시 마주했다. 내가 엄마와 딸에 관한 책을 모조리 사서 읽을 기세로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다시 내 앞에 놓였다. 이번에는 인터넷 서점으로 그냥 주문을 해버렸다. 왜 그렇게 많이 읽혔는지 알고 싶었다. 책을 반쯤 읽었던 것 같다. 타인에게서 나를 보는구나. 생각이 번쩍했다. 당신의 어머니가 김치찌개보다 된장찌개를 선호하듯 우리 엄마는 김치찌개에 참치 넣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맹세하건대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나는 그 책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에세이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에 관해 너무 늦게 깨달았다. 타인의 엄마 앞에서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어릴 때부터 글을 통해 많은 감정들을 해소했다. 글을 쓰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미천한 글쓰기 실력으로 여러 경험을 했다. 그러나 결코 엄마에 대해 써본 적은 없다. 그것은 나에게 치명타였으니까. 아킬레스건이 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기괴한 이미지를 떠올려본다. 나는 엄마에 대해 쓸 수 있을까. 지난 몇 년간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수도 없이 노력해 왔다. 사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꼭 이 숙제를 마치고 싶었다. 내가 쓰지 않고서는 결코 이 과제를 끝낼 수 없을 거라는 거대한 악몽 앞에 섰다. 나에게는 4명의 엄마가 있다. 이건 그녀들에 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