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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Oct 28. 2019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당신'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 vs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



오늘도 한 명을 죽였다. 

극적 갈등을 위해 작가가 선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야기 속 캐릭터를 죽이는 것이니까.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언제나 절대자이다. 

주인공이 가장 행복한 순간, 

단 두문장 만으로도 불행의 씨앗을 던질 수도,
주인공이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고 할 때, 

하늘에서 '진짜' 천사를 내려다 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의지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만든 작품 속 캐릭터가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그의 애달픈 간청에도 캐릭터들을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을까? 



그날도 열심히 양치를 하고 출근하려던 해롤드 크릭, 
갑자기 귀에서 환청이 들린다.
자신이 양치질을 몇 번 하는 지조차 정확하게 설명하는 누군가의 목소리...
처음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미친 게 아니었다.
해롤드 크릭은 자신이 한 작가가 쓰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캐릭터가 있다. 

부잣집 외동딸에 잘생긴 백경과 약혼한 사이.

게다가 어릴 때부터 앓고 있는 심장병까지.

누가 봐도 이 설정은 주인공의 것이라 생각한 은단오.
알고 보니 자신은 주인공도 조연도 아니고 단역 5번쯤 되는 캐릭터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자신이 이야기 속 캐릭터라는 걸 깨달았을 때 

해롤드는 자신과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작가를 찾아간다. 

작가는 그 세계에서 작품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작가가 결정한 자신의 운명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고뇌에 싸인 작가와 그를 만나러 온 주인공이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

내가 마치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 

자신이 이야기 속 캐릭터라는 걸 깨달았을 때 

단오는 자신이 도구처럼 사용되는 이야기의 흐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작가는 은단오라는 캐릭터에게 

시도 때도 없이 오는 심장통증, 약혼자로부터 냉정한 눈빛과 폭언 그리고 폭력,

그리고 시한부 인생까지 안겨준다.


이쯤 되면 그 어떤 캐릭터라도 자신의 운명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설정 값이다. 

아마 단오는 스트레인저 댄 픽션 속 작가와는 달리

자신을 만든 작가에게서 그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나 보다.

작가와 어떠한 협상의지 없이 자기 스스로가 길을 개척하려는 걸 보면.



일반 관객 및 시청자는 이것들을 그저 재밌는 이야기로 소비하고 지나칠지 모른다. 

그러나 창작자 또는 창작자를 꿈꾸는 사람들은 보는 내내

나는 어떤 창작자인가에 대한 물음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담배와 두통에 절어 살 정도로 고뇌하며 한 땀 한 땀 이야기를 써나가는 작가인가,

아니면 이 작품 저 작품에서 캐릭터와 클리셰를 돌려막기하며 대충 갈겨쓰는 작가인가.



하지만 작가의 자유의지와는 별개로

실은 작가의 존재 이유야말로 시청자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작가는 캐릭터 한 명 한 명에게 애정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의 삶과 죽음이 캐릭터와 캐릭터에 공감할 시청자들에게 

어떤 심상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들은 한 작품이 끝나고 나면 지옥에서 심판을 받는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할 것이다.


당신은 도움을 구하는 캐릭터에게 손을 내민 적이 있는가.

당신은 글을 쓰는 손으로 캐릭터에게, 시청자에게 마음의 죄를 지은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따라 심판받는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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