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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resavie Dec 21. 2016

나라는 사람은 당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인가요?『정체성』

정체성 / 밀란 쿤데라 





당신을 알고부터 모든 게 달라졌어. 내 하찮은 일이 예전보다 흥미로워진 것은 아니야.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우리 대화의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지.
: P87









지극히 사적인 감수성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들은 부모, 친구,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에 아주 깊숙이 관여한다. 이처럼 나의 '정체성'은 나와 관계 맺는 '타인'에 의해 규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오직 혼자의 힘으로 성장하고 완성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그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남자들이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아서 슬프다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난 뭐야? 난 말이야? 당신을 찾아 해변을 수킬로미터씩 헤맸고, 울면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고, 당신을 따라 지구 끝까지라도 뛰어갈 수 있는 나는 뭐지? : P26



연상의 여인 샹탈은 어느 날 자신의 애인 장마르크에게「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라고 말하며 슬픔에 빠진다. 자신의 외적인 모습이 더 이상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한 것이다. 나는 샹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또한 나이가 좀 더 들어 스스로 더 이상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너무나도 절망적일 것 같다.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남자가 있는 것과는 별개로 여자라면 누구나 어떤 이의 아내, 엄마, 딸도 아닌 '여자'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을까? 뛰어난 외모와 몸매를 갖지 않았더라도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분위기나 느낌 같은 '여자'로서의 매력 말이다.




수줍음이 되살아나자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히는 법을 배운 것이다. : P76




샹탈의 이 한 마디에 장마르크는 그녀를 몰래 흠모하는 남자, 즉 '시라노'가 되어 그녀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낸다. 처음엔 대수롭게 여기던 샹탈도 편지를 받을 때마다 조금씩 설렘을 느끼고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늙음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며 시무룩하던 그녀가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며 평소에는 하지 않던 진주 목걸이를 하는가 하면 수줍게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들뜨고 생기 있는 여자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누구인지도 모를 한 남자가 자신을 애정을 갖고 지켜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삶이 달라진 것이다. 장마르크는 자신의 연인인 샹탈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그녀를 평소보다 훨씬 깊이 관찰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인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샹탈을 늙은 '연상'의 여인이라 여겼던 생각들이 결국은 자신이 만들어낸 샹탈의 외적 기준일 뿐이었음을 느낀다. 또한 그러한 외적인 모습 외에도 그녀의 내면에는 또 다른 모습의 그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녀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은 남녀관계를 뛰어넘어 인간적으로 상대방을 신뢰하고 있음을 확인하며 새롭게 사랑을 시작한다. 다른 정체성을 가진 두 사람이 상대의 모습을 인정하고 각자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아무리 해주어도 소용없고 사랑에 가득한 시선도 그녀에겐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시선은 개체화된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 육체로 쏟아지는 시선이다. 이런 시선들이 그녀를 인간 사회 속에 머무르게 하고 사랑의 시선은 그녀를 사회로부터 유리시킨다. : P43




고정된 정체성이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에 의해 변화할 수 있고 혹은 서로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진심으로 서로를 신뢰하는 관계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고 그 관계를 지속하고 성장시켜나가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거나 스스로 좀 더 나은 모습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의 정체성이란, 지금까지 내가 만나왔고, 나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쳤으며,  여전히 내 옆에서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그런 관심과 애정과 신뢰를 보여주는 나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세월의 흐름 속에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그들의 도움과 조언과 애정이 절실히 필요할 것 같다. 





사심 가득한 문장들




사랑하는 여자와 다른 여자를 혼동하는 것. 그는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일을 겪었던가. 그때마다 놀라움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녀와 다른 여자들과의 차이가 그렇게 미미한것일까? 이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실루엣을 어떻게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 P25



사랑의 초기 시절을 생각했다. 그녀를 정복할 필요도 없었다: 첫번째 순간, 그녀는 정복되었다. 그녀를 돌아본다고? 무엇 때문에? 처음부터 그녀는 그의 곁에, 코 앞에,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강했고 그녀는 약했다. 그들 사랑의 기반에는 이런 불평등이 깔려 있었다.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 부당한 불평등. 그녀는 연상의 여자였기 때문에 약했던 것이다. : P44



그녀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녀가 가장 약하고 자기가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라고. 사실 누가 더 강한가? 두 사람 모두 사랑의 영토위에 있을 때 강한 사람은 사실 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사랑의 영토가 그들 발밑에서 사라진다면 강한 자는 그녀이고 약한 자는 그이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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