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 장강명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 P 160
정말 단순히 한국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이 땅을 떠나야겠다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기에 '한국이 싫어서' 호주 이민을 떠난 주인공 계나는 보통 이상의 용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며, '한국이 싫어서'라는 이유의 속내는 여섯 글자에서 풍겨오는 단도직입적인 의미, 그 이상일 것이다.
내가 여기서는 못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 P 11
주인공 계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이 책은나에게는 친구가 옆에서 들려주는 실화처럼 아주 생생하게 다가온다. 최근 관심을 갖게 된 호주가 배경이어서도 그렇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워킹홀리데이'라는 명목으로 호주 땅을 밟고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가족과 친구들, 번듯하고 안정적인 직장, 스펙, 외모, 집안까지 좋은 남자 친구마저 다 버리고, 호주라는 넓은 땅에 한국이 싫어서 떠난 계나는 이렇게는 도저히 못살겠다며 도망치듯 이 나라를 떠나지만, 결코 무책임하거나 막무가내는 아니다. 호주 시민권을 얻기까지 6년 정도의 시간을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대로 묵묵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
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과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들의 수입이 별로 크게 다르지 않은 나라 호주. 무슨 일을 하든 직업이나 개인의 스펙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나라 호주. 우리나라 현실과 비교해봤을 때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얘기처럼 들려서 호주라는 나라가 더욱더 이상적인 세게로 여겨지는 것 같다. 그 나라만의 고충이 왜 없겠냐만은.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김연아라든가, 삼성전자라든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내가 형편이 어려워서 사람 도리를 못하게 되면 나라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내가 국가의 명예를 걱정해야 한다는 식이지. 내가 외국인을 밀치고 허둥지둥 지하철 빈자리로 달려가면, 내가 왜 지하철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빈자리를 찾는지 그 이유를 이 나라가 궁금해할까? 아닐걸? 그냥 국격이 어쩌고 하는 얘기나 하겠지. : P 170
나도 한국이 싫다고 생각될 때가 많이 있다. 사실 대체로 싫다. 흔히 우리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이 그렇다. 어찌 된 나라가 부자인 사람은 점점 더 부자로 살고, 가난한 사람은 끝도 없이 가난하게 산다. 착하고 성실하게 산다고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전혀 아니다. 난 애초에 그럴 깜냥도 아니라는 걸 알지만, 옛날 말로 '개천에서 용 난다'는 것도 옛말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물질을 많이 쥐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과시하기 바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물질적 행복을 최고라 여기고 동경하며 그들의 발끝이라도 따라가려고 아등바등 대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어딜 가든 나이, 출신학교, 직업, 회사, 사는 곳 등 흔히 우리가 '스펙'이라 부르는 것들로 한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차별이나 무시를 당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나라에서도 어떤 무리에는 전혀 '섞일 수가 없는'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다. 나는 마음먹고 스펙을 쌓아가야만 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부모가 능력이 있거나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다. 내가 갖은것이라고는 그저 건강한 이 육체뿐. 내가 지금 갖고 있는 타이틀 중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것 또한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이 사회에서 언제까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오랜 시간 동안 해왔다. 나는 스스로 물질적인 것을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돈 때문에 웃고 울기도 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기도 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돈이나 번듯한 직장,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들처럼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막연히 돈이 세상에 전부라는 건방진 생각을 했던 것도 같은데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며,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또 한다. 계나처럼 이민자의 천국인 듯 보이는 호주 같은 나라로 이민을 갈 용기도 능력도 내게 아직 없다만, 사람 일은 알 수가 없는 거니까.
막연하게나마 미래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던 요즘, 새로운 희망이랄까 가능성이랄까.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라는 걸 알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허무맹랑해서 소설로만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하고 또 한 번 배우며 책을 덮는 그 순간까지 왠지 모를 설렘을 안겨준 책. 그리고 한편으로는 주인공 계나가 정말 부럽다.
아침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현역에서 역삼역까지 신도림 거쳐서 가 본 적 있어? 인간성이고 존엄이고 뭐고 간에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다 장식품 같은 거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돼. 신도림에서 사당까지는 몸이 끼이다 못해 쇄골이 다 아플 지경이야. 사람들에 눌려서. 그렇게 2호선을 탈 때마다 생각하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하고. 나라를 팔아먹었나? 보험 사기라도 저질렀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도 생각해. 너희들은 무슨 죄를 지었니? : P 16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서울이 옛날이랑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야. 나아지는 게 없어. 내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어.
: P 103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봤어. 나는 먹는 거에 관심이 많아서 맛있는 음식이랑 과자를 좋아하지. 또 술도 좋아해. 그러니까 식재료랑 술값이 싼 곳에서 사는 게 좋아. 그리고 공기가 따뜻하고 햇볕이 잘 드는 동네가 좋아. 또 주변 사람들이 많이 웃고 표정이 밝은 걸 보면 기분이 좋아져. 매일 화내거나 불안해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게 전부야. 그 외에는 딱히 이걸 꼭 하고 싶다든가 그런 건 없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아는 건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일단 난 매일매일 웃으면서 살고 싶어. 남편이랑 나랑 둘이 합쳐서 한국 돈으로 1년에 3000만 원만 벌어도 돼. 집도 안 커도 되고. 명품 백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어. 차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돼. 대신에 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을 때에는 돈 걱정 안 하고 먹고 싶어. 어차피 비싼 건 먹을 줄도 몰라. 치킨이나 떡볶이나 족발이나 그런 것들 얘기야.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 남편이랑 데이트는 해야 돼. 연극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탄다거나, 바다를 본다거나 하는 거. 그러면서 병원비랑 노후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나는 당당하게 살고 싶어. 물건 팔면서, 아니면 손님 대하면서 얼마든지 고개 숙일 수 있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난 내가 누구를 부리게 되거나 접대를 받는 처지가 되어도 그 사람 자존심은 배려해 줄 거야. 자존심 지켜 주면서도 일 엄격하게 시킬 수 있어. : P 152
나는 행복도 돈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해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나는 지명이도 아니고 엘리도 아니야. 나한테는 자산성 행복도 중요하고, 현금흐름성 행복도 중요해. 그런데 나는 한국에서 나한테 필요한 만큼 현금흐름성 행복을 창출하기가 어려웠어. 나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나는 이 나라 사람들 평균 수준의 행복 현금으로는 살기 어렵다. 매일 한 끼만 먹고살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는 걸. : P 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