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김연수/문학동네/2009
타의적으로 맞은 n번째 인생의 전환기에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언제나처럼 정답을 얻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하루 한 권씩 내가 좋아했던 문장들을 살펴보고 나라는 인간을 다시 돌아본다. 어찌 보면 나만큼 확증편향이 심각한 인간도 없을 것 같다. 하지 않을 일들을 후회할 거라면. 음. 그래도 지난 5년간 하고 싶은 일들은 재미있게 하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남은 인생동안 후회하지 않을 만큼 다 했나? 지겹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다.
지금 이 도로가 왜 막히는지 알아? 예, 라디오에서 노점상들이 시위를 벌인다고 했잖아요. 아니야, 지겨움 때문이야. 내가 말했습니다. 신문에서 그 자살한 노점상에 관한 기사를 읽었어. 마흔세 살. 내 나이와 같더군.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
요즘 들어서, 살아오는 동안 안 하고 넘어간 일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청년은 아직 이게 무슨 기분일지 모를 거야. 한 일들은, 그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안 한일들은 해봤자였다고 생각하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왜, 하지도 않는 일이 잊히지 않는다니까 우스워요? 그러게. 그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그 여자 친구를 찾아가서 시인이 당신을 무척 사랑했노라고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
나는 생각해봤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 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다시 수만 년이 흐르고, 빙하기를 지나면서 여러 나무들이 멸절하는 동안에도, 어쩌면 한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을지도 모르고, 그 나무는 한 연인의 사랑을 기억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