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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knight Nov 16. 2020

깡소주 한 모금만큼의 허세

대학교 1학년 시절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다. 

나는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에 드라마 속 인물이라도 되어야 했다. 


"깡소주" 


젊은 청춘의 시련을 달래줄만한 상징. 그것이 생각났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나는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다. 


편의점에서 호기롭게 소주 한 병을 샀다. 

집 근처 아무도 없는 초등학교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나는 시련의 주인공이다. 

소주 뚜껑을 따고 원샷을 딱 때리고 방황을 할 테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뚜껑을 따는 것은 계획대로 되었다. 뚜껑을 따는 것까지만. 

하지만 소주는 "요만큼", 아주 "요만큼" 입에 넣었는데 도저히 넘어가 질 않았다. 

분명 나는 너무나 힘든 시련의 주인공인데 소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다. 

도저히 넘기지 못하는 소주를 운동장에 뽈뽈뽈 쏟아버렸다. 

방황은커녕 집에 아주 잘 들어가서 자리를 깔고 잠이 들었다는 슬픈 이야기. 


허세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는 가끔 이 찌질한 에피소드를 꺼내보곤 한다. 


언젠가 영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기는 힘들어서 바다에 왔는데 파도가 몰려오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자신을 보고 웃고 말았다고. 

이거랑 좀 비슷한 맥락일까.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있다. 

너무 슬프고 싶은데 슬프지 않은, 혹은 슬플 수 없는.  

그것이 환경 때문이든 스스로 때문이든. 

딱 소주 뚜껑 따는 것까지만, 그만큼만 허용되는 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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