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입하는 편집자, 여섯 번째 편지
수현,
우리 집에는 ‘2007년 4월 24일의 세상’, ‘2010년 5월 3일의 세상’이란 제목의 스크랩북 두 권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만들어놓은 것으로, 논조의 정치적 지향을 막론하고 아이가 태어난 그날의 신문을 종류별로 사서 스크랩해놓은 것이지요. 자신들이 놓여 있는 세상의 정황을, 언젠가 저 스크랩북이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리하여 기어코 저 아이들이 세상을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그날의 신문들을 살펴봅니다. 짧게는 십여 분, 길게는 점심시간까지 이용해서 한 시간 남짓, 어떤 날은 기사 제목들만 챙기고 어떤 날은 여러 기사와 칼럼을 읽고 스크랩해두기도 합니다. 회사로 배달되어온 신문을 훑어봅니다. 기사의 배치에는 편집자의 메시지가 담겨 있지요. 신문에 실린 광고의 면면은 언론의 쇠락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SNS의 타임라인은 시간 날 때마다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아주 간혹 잠재적 저자를 발견하기도 하고, 기획과 홍보를 위한 실제적인 정보를 얻기도 합니다. 평일과 주말의 유입률, 일상성과 이슈의 간극, 무엇보다 나의 타임라인은 사심과 편향의 목록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도 합니다.
제가 근무했던 한 출판사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트렌드보고서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책, 음식, 패션, 핫플레이스, 영화, 방송 프로그램 등의 다양한 사례를 조사한 후 성별, 세대별, 직군별 트랜드 흐름을 공유하고, 이를 기획회의와 마케팅회의에서 활용했지요. 부지런한 편집자와 마케터는 모임을 만들어 연말마다 몇몇 기관에서 발표하는 메가트렌드megatrend 전망을 정리하여 스터디하기도 했습니다(‘메가트렌드’란 미국의 미래학자 존 네이스비츠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시대적 조류를 뜻합니다).
출판기획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될까요? SNS에서 저자나 아이템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장의 흐름에 조응하거나 트렌드를 한껏 반영하는 것으로부터 수많은 책이 만들어집니다.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책을 만들어가면서도, 저는 무릇 책이란 트렌드, 시장 상황, 심지어 거대한 시대적 조류에 맞서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텍스트를 복원하는 일이라는 오랜 생각을 소환해내곤 합니다.
편집자는 날마다 뉴스를 읽으며 지금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피겠지만, 그 이전에 그 정황과 맥락을 읽어낼 수 있는 ‘사상의 지도’를 가진 자들이어야 합니다. 편집자는 트렌드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를 늘상 고민하겠지만, 동시에 트렌드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텍스트를 열망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사상의 지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시대적 조류에 휩쓸려 길을 잃지 않으며, 견고하게 벼려진 텍스트가 트렌드의 감각을 입을 때 독자를 한껏 매혹하는 책이 될 것입니다.
수현, 편집자라면 사상의 지도를 가진 자라야 합니다.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원고가, 내가 만들려고 하는 책이 어떤 사상적 흐름과 역사적 맥락 속에 놓여 있는지를 단숨에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양사는 기원전 8세기경 눈먼 시인 호메로스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소크라테스, 플라톤(기원전 428년경~기원전 424년경),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기원전 322년) 등으로 이어지는 그리스철학은 서구 인문학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일리아스》는 위대한 전사 아킬레우스가 적나라한 인간 본성의 한계에 대항하는 영웅 서사입니다.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모든 영웅들은 관습적으로 요구되는 역할에 그치는 반면, 아킬레우스는 비범한 행동으로 정점에 도달하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운명에 굴하지 않은 그의 영광스런 죽음은 비극적이되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디세이아》는 또 다른 영웅 오디세이아가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10년간의 여정을 다루지요. 《일리아스》와는 달리 《오디세이아》는 희극으로 끝납니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두 영웅은 비극을 통과한 후에야 희극에 닿습니다. 비극은 그리스철학에서 운명에 갇힌 인간의 조건을 성찰해내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희극을 품은 그리스인들은 서구적 낭만을 발명해냈습니다.
시인 호메로스가 인간의 운명과 그에 처한 현실을 재연해냈다면, 철학자들은 우리가 보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겼습니다. 철학자들은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본질을 찾아내고자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플라톤의 ‘대화’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을 규정하기 위한 최적의 형식이었지요.
기독교의 시대였던 중세는 비극을 용인하지 않음으로써 비극적인 암흑으로 치달았습니다. 오직 신의 은총이 없는 세계가 비극일 뿐이므로, 기독교가 지배한 세상에서는 오직 천국의 기쁨만이 존재해야 했습니다. 희망이란 오직 천국으로 향하는 길에만 허락된 은총이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중세의 정신을 대표하는 작품이지요.
오래전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시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시인들은 사악한 자들의 번영과 의로운 자들의 불행을 다룬다는 점에서 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으며, 미학적 측면에서 비극과 희극을 둘 다 잘 쓸 수 있는 시인이 없다고 일갈하였지요. 근대에 이르러 비극과 희극 모두 잘 쓰는 탁월한 시인이 등장하였는데, 바로 셰익스피어(1564~1616)였습니다.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근대 문학이 시작되었으며, 현대에 통용되는 문학은 모두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셰익스피어는 고대와 근대, 기독교와 타종교의 경계에 놓여 있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비극은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세상에 돌아왔습니다. 비극의 서사는 비극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추동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을 희극에 이르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거나 종교적 도그마에 굴복하지 않은 채, 각각의 서사를 통해 비극적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운명과 사랑과 낭만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해냈습니다. 모름지기 서사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사유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요. 18세기 말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부터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모더니즘의 시대로 불리며, 철학, 문학, 예술, 건축, 과학, 종교, 사회 전반에 걸쳐 전통적인 기반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나려는 경향성이 시대정신으로 작동하였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보편성과 영원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며 엄청난 진보와 퇴행을 동시에 경험하며, 모더니즘은 급격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체되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지요.
카를 마르크스(1818~1883),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는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하여 20세기와 21세기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상가들입니다. 이들은 절대적 힘을 가진 외부의 우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퍼포먼스에 의해 세계와 인간의 역사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 퍼포먼스의 역동을 마르크스는 프락시스로, 니체는 초인적 힘으로, 프로이트는 무의식으로, 소쉬르는 체계(구조)라고 불렀습니다(대안연구공동체 기획, 《20세기 사상 지도》, 부키, 2012).
모더니즘의 세상에서 태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온몸으로 풍자했던 찰리 채플린(1889~1977)의 말처럼,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겠지요.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의 서사처럼, 세상은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입니다. 사상가는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오늘의 현상을 향해 질문하고 반대 진술을 만들어내며 본질을 추구한 이들입니다. 사상은 세상의 중력을 거스른 이들로부터 생성됩니다. 편집자는 사상가를 기획하고 사상을 편집합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근육은 그 과정에서 길러지겠지요. ‘사상의 텍스트’를 벼려내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사상의 지도’를 갖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