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사 오지 않은 이유
신기한 것도 많고, 새로운 것도 많고 무엇보다도 싼 게 너무 많은 나라이지만, 한국에 가져가기 위해서 기념품 같은 걸 사는 행위자체를 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실패의 경험 때문이다. 해외여행을 처음 다니던 시절에는 비행기에서 받은 설탕도 챙겨 오곤 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즐거운 경험이었므로 어떤 실물을 가져와서 기억하고 싶었던 어린 마음이었다. 기차표도 챙겼고, 카페 영수증도 챙겼었다. 어디 그뿐이면 다행이게, 지금은 우리 집에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이케아가 그때는 왜 그리 신세계였는지 싱가포르에서는 이케아 쇼핑한 가격보다 포장비가 더 드는대도 조명이며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를 다 이고 지고 왔다. 태국에서는 당장 한국 가면 똠양꿍만 먹을 사람처럼 온갖 향신료와 소스(어차피 SSG에 다 파는데) 쓸어오기도 했었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결국 6번의 이사를 거치며 모두 야금야금 조금조금씩 쓰레기가 되었고, 유통기한 지난 음식이 되었고, 멀쩡히 재활용센터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 추억도 사라진 건 아니라는 것. 그런 것들이 경험으로 납득된 나이가 된 후로는 나는 여행에서 기념품이라는 것에 욕심 내지 않게 되었다. 20개국 이상 모았던 스타벅스 텀블러도 더 이상 모으지 않게 되었다. 매번 이사 때마다 고민하게 되는 찬장 한 칸이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이유가 생겼다. 기념품을 생필품을 대체하는 재미가 생겼다.
이제 내가 바깥나라를 나가면 사 오는 것은 치약 같은 것 들이다. 현지에서 큰 것 하나를 구입해서 양껏 쓰고 남은 것을 집으로 가져온다. 그러면 그 치약이 다 소진하는 기간까지가, 지난 여행을 추억하기가 딱 알맞다. 냉장고에 붙이는 기념품 마그넷보다는 여행의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풍기던 향긋한 라임치약향기정도를 내 집으로 가져오는 것. 그래서 양치를 하는 동안은 잠시 여행을 추억해 보는 것, 내가 생각하는 진짜 '기념품'인 것 같다.
그래서 여행에 갈 땐 아무런 생필품들을 준비해 가지고 않고 현지에서 생리대도 큰 거, 선크림도 큰 걸 산다. 거기에서 남의 나라 거를 써보는 재미를 느낀 후, 남은 것들을 한국에 가져와서 계속 쓴다. 내 손이 닿는 곳들에 다른 언어들이 뒤섞인 물건들을 보는 것도 재미이고, 별것 아닌 생필품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게 좋다. '하와이에서 사 온 선크림' "베트남에서 사 온 생리대' '호주에서 사 온 커피' 일상적인 삶에서 잠시 추억을 불러내는 묘한 주문 같아지는 기분이다.
오늘도 베트남 마트를 가서 둘러보며 몇 가지 사고 싶은 것들의 유혹을 잠시 느껴본다. 사지 않고 가면 아쉬울 물건들을 눈에 담는다. 가지고 와서 기어이 재활용센터로 가는 아까운 것이 되는 것보다, 갖고 싶었던 물건으로 남겨두는 안달감이 낫다고 달랜다. 이곳에 올 때도 캐리어하나를 절반만 채워왔지만, 돌아가는 캐리어도 다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대신 까맣게 그을려진 피부색으로, 아침마다 쓰던 라임향 치약냄새로, 쌀국수에 넣어먹던 향신채향으로, 찐하고 달았던 쓰어다의 맛으로, 손에 물들던 빨간용과의 색깔로. 모든 감각들로 나는 채워가겠다.
추억은 소유가 아니고, 공유이고 향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