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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May 23. 2022

존재하는 부재 혹은 그 반대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의 [은유로서의 건축] 재해석


1.

숫자 퍼즐을 기억할 것이다. 혹은 지금도 종종 숫자 퍼즐을 현재형으로 즐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3×4칸에 1~11까지 네모칩이 있고 12란은 비어있어서 뒤죽박죽 섞은 뒤에 다시 숫자를 원위치에 맞추는 2차원 퍼즐이다.


이 퍼즐은 그 빈 칸이 하나 있기 때문에 게임이 가능하다. 만약 3×4칸에 12개 칩이 모두 들어있다면, 그것은 게임이 아니라 장식품이다. 그 비어 있는 칸을 가상의 '12'라 생각하고 움직여도 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더 흥미로운 점은, 1-11까지 모든 숫자가 그 가상의 12 하고만 자리를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1까지의 숫자는 자기들끼리는 자리교환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때 가상의 12는 만능 교환키다.


2.

숫자 0의 발견도 비슷하다. 0이 없었더라면 2와 20000을 어떻게 구별했겠는가. 0은 '없음'을 뜻하지만, 그 없음이 있음으로 해서 수의 크기를 달리 표기할 수 있고 지금과 같은 연산이 가능해졌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저마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인격체라고 생각한다.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느니, 성장기 때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느니 같은 말을 일상적으로 쓴다.


그러나 라캉에 의하면 그러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 우리의 자아는 사실 공백이다. 주목할 점은, 나의 내부가 비어있기 때문에 나는 나라는 가상의 자아를 유지하며, 혹은 변화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거다. 만약 자아의 자리가 부재하지 않고 무언가가 정말 존재했더라면, 우리는 서로 소통 불가능할 것이며 사회를 구성할 수 없고 지금과 같은 문명과 문화는 꿈도 꿀 수 없다.


4.

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도 비슷하다. 고전경제학에서 화폐는 단지 가치의 표식, 상품의 교환 수단, 가치의 저장고로 인식되지만, 사실 우리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화폐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경품으로 1만원 지폐와 1만원 짜리 상품을 고르라고 한다면, 모두들 지폐를 고를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둘 다 분명히 1만원치의 가치를 띠며 사회적으로 동등한 가치로 인정되고, 우리가 시장에서 판매/구매할 때 해당 상품과 1만원을 맞교환하는데도, 사람들은 지폐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지폐는 그 어떤 상품과도 교환할 수 있지만, 상품은 다른 상품과 맞교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맨 처음 숫자 퍼즐을 떠올리자. 거기서 빈 칸이었던 가상의 12는, 자본주의 사회의 화폐와 동일한 입지를 가진 셈이다. 그리고 1-11의 칩은 자본주의의 상품과 동일하다.


화폐는 분명 그 자체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부재하는 '빈 곳'이다. 그럼에도 그 비어있음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모든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5.

숫자 퍼즐의 빈 칸, 숫자 0, 자아, 화폐는 모두 '무'임에도 우리는 그것의 부재를 인지하지 않는다. 그것들이 확고한 실체라고 믿지만 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들이 없음에도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그것들의 위상을 중심으로 삼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각각의 시스템은 작동한다.


0.

위의 얘기는 책을 통해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으로 책의 내용과 다를 수도 있다. 진짜 원전이라는 게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로티 후설 하이데거 니체 프로이트 라캉 마르크스 등을 섭렵하며 그의 생각을 다졌다. 그가 참고한 학자들 또한 기존의 다른 누군가를 읽으며 세계관을 정립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생각의 맨 처음은 어디인가. 그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또 분명히 있다. 생각의 기원은 존재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부재의 자리에 있는 게 아닐까. 책이란 건 그러므로 생각과 생각의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인지도 모른다. 이 글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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