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나 사설시조를 떠올려보자. 시조나 사설시조에는 나름 엄격한 규칙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규칙성 안에서 재밌고 감동적인 작품이 탄생한다. 그렇다면 그 재미와 감동은 시인의 창조성에 속할까? 아니면 시조라는 규칙성에 속할까? 이 논의는 결국 시인에게 주체성을 기대할 수 있느냐 없는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바둑의 예를 들어도 좋다. 내가 아는 바둑기사는 이세돌과 알파고뿐이니 그에 대해 말해보자. 이세돌은 창의적인 플레이어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그가 바둑의 룰을 깨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세돌의 창의성은 룰을 지키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까. 아니면 이세돌의 주관적인 노력과 훈련과 영감에 의한 걸까.
알파고로 넘어가면 논의가 기묘해진다. 애초에 알파고에게는 의식이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알파고는 계산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고도의 계산을 이제 인간 바둑기사들은 간파해내지 못하는 수준이 됐다. 알파고는 철저히 수용적인 프로그램이다. 바둑의 룰과 다른 플레이어들의 수를 모두 입력한 게 전부다. 이쯤 되면 알파고의 창의성은 바둑의 룰에서 나온다고 봐야 한다.
이게 소쉬르가 넘으려다 실패한 산이었다. 이것을 그가 다시 어떻게 뛰어넘는지 보자.
2.
그것은 바로 번역의 문제다. 가령 affair를 '정사'로 번역한다고 치자. 물론 두 단어 사이엔 모종의 교집합이 있지만 겹쳐지지 못하는 여집합도 꽤 크다. 다른 번역가는 affair를 '애정'으로 번역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에도 나름의 겹침과 어긋남이 존재한다.
영어든 한국어든 각각의 언어는 독립적인 세계관이므로 두 언어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그 두 세계를 단일하게/일관되게 연결하려는 시도가 번역이다. 이때 그 번역의 방법론이나 형태, 결과 등은 번역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관건은 어떤 번역이 더 나은 번역이냐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 따윈 없다는 것이다. 각자의 번역은 저마다의 연결고리와 질서를 형성하게 된다. 번역자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 없었던 길을 완전히 새로 낸다.
이 지점이 주체성과 창의성이 가능한 채널의 하나라는 것. 동시에 소쉬르가 구조주의를 극복한 듯한 지점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