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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02. 2022

이창동의 변곡점

영화 <버닝> 양비론적으로 읽기

종수의 엄마는 어릴 때 집을 나갔다. 종수 아빠는 무소 고집에 범법자로, 사회적 질서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이 가정사는 종수가 온전히 사회화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을 함의한다. 종수가 작가가 아니라 작가‘지망생’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이미 이야기를 완성한 사람, 즉 자기 서사가 있는 자라면, 지망생은 아직 자기서사가 없는 인물이다. 심지어 종수는 아직 소설 쓰기를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벤에게 토로한 “전 아직 무슨 소설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라는 말에서 자기 서사가 아예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말은, 종수가 사회에서 어떠한 입지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사회화가 시작도 하지 않은 단계라는 뜻이다.


그런 종수에게 처음으로 ‘의미’가 된 건 해미다. 해미는 없는 걸 있다고 지어내는 사람이다. 없는 걸 있다고 믿게 만드는 사람이다. 해미는 술자리에서 없는 귤을 먹는다. 고양이를, 아프리카 여행을, 어릴 적 우물을 부재에서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영화에서 보일이와 우물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해미는 정말 아프리카 여행을 갔다 온 건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종수도 관객도 그것을 실제로 보지 못했으며, 다만 해미의 말을 통해 전달받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접하지 못하는 것들을 반드시 타인의 말/글을 통해 알게 된다. 여기서 퀴즈를 하나 내보자. 자신이 직접 겪는 감각 정보가 더 진실할까, 타인을 통해 전해 듣는 언어 정보가 더 진실할까.


위 퀴즈를 영화 <버닝>에 적용해 보면 이렇게 변환된다. 해미는 벤이 죽인 걸까, 해미 스스로 사라진 걸까. 종수의 감각 정보는 벤을 사이코패스 시리얼 킬러라 판단하는 반면, 해미의 언어는 조만간 자신이 사라질 것을 암시한다. 종수는, 관객은, 어느 쪽을 믿을 것인가.


그런데 위 질문은 감독이 중요하게 의도한 속임수이다. 해미가 살해됐는지 사라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끝내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이며, 따라서 아무 의미가 없다.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것에는, 근본적으로 의미도 없다. 이창동 감독이 그런 무의미 찾기에 이 영화적 에너지를 할애했겠는가. 다만 감독은, 벤이 살인자라고 해석하기 쉽도록, 해미가 벤에게 살해당했다고 이해하기 쉽도록 연출한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것은 지난 20년 가까이 한국영화가 선보였던 미스터리 상업영화에 대한 냉소라고 나는 파악한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헛간을 태우다>는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다. 그것을 왜 이창동은 미스터리 영화로 연출해야 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기존 한국의 미스터리 상업영화에서는 결말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밝힌다. 범인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동기에서 살인자가 되었는지 등도 소상히 드러난다. 그리고 대개는 범인의 죽음이나 검거 등과 같은 범인의 실패와 악의 몰락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렇다면 그 영화들은 해피엔딩일까. 이렇게 물어보자. 범인이 처벌받으면 문제가 해소되는 걸까. 사람들은 쉽게 어떤 문제의 원인을 특정 인물이나 요인에 몰빵하고 그것만 고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이창동은 묻고 싶은 거다. 정말 그러냐고.


범인의 처벌과 몰락에는 속시원한 서사적 쾌감은 있지만, 미학적 성취도 정치적 해소도 없다. 그런 결말은 사람들을 속이고 심지어 생각을 단순화시키기까지 한다. 권선징악은 근대사회의 윤리가 될 수 없다. 확실히 이창동의 연출은 사악했다. 관객을 너무 쉽게 시험에 빠뜨린다. ‘해미 실종의 원인을 벤 탓으로 돌리고 싶지? 그렇지?’ 하고 이창동은 수차례 묻고 있다. 다시 한 번, 나는 여기서 벤이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해미가 살해당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고 싶은 욕망에는, 더 큰 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맹점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종수와 함께 해미 찾기에 따라나선 관객들은 감독의 꾐에 빠져 정작 중요한 것에는 의문을 던지지 못한다. 왜 종수는 벤을 죽일까? 왜 끝내 해미는 (시체로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다시 영화의 초반부로 돌아가자. 펜을 아직 들지도 않은(키보드에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종수는 당연히 해미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언어가 없는 자가 어떻게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겠는가. 종수는 해미를 이해하진 못하고 다만 욕망한다. 사실 모든 인간이 그렇다. 우리는 일단 욕망부터 한다. 이해의 시점은 먼훗날이다. 해미 집에서 보이는 남산타워, 타워에 비치는 한 순간의 햇빛, 이후 해미 집에서의 반복되는 자위는 해미에 대한 종수의 욕망을 증명한다. 해미를 욕망하는 종수는 해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방해물과 마주친다. 벤. 그는 해미가 욕망하는 대상이다. 적어도 종수 눈엔 그렇게 보인다. 이제 종수는 벤을 알고 싶어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해미가 욕망하는 대상을 이해해야, 자신이 욕망하는 해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수는 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종수에게 벤은 개츠비다. 뭐 하는지는 모르지만 돈 많은 사람. 한국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다고 종수는 말한다. 종수에게 한국은 개츠비의 세계다.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돈 많은 사람들이 갑인 세계. 이제 종수는 벤을 미워한다. 해미를 갖고 싶기 때문이다. 이해보다 욕망이 우선이다. 시간 차원에서도 그렇고 중요도 차원에서도 그렇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자신을 바라본다던, 괴물과 오래 싸우면 괴물이 된다던, 니체의 말은 여기서도 찰떡이다. 종수에게 남은 일은 벤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추적의 목적과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종수는 벤이 해미를 살해한 게 맞으며, 자신은 그 증거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게 중요하다. 종수에게 진실은, 벤이 살인자라는 것이다. 그 증거가 종수의 내면에 다 차올랐을 때, 종수는 벤을 죽인다. 그러므로 벤을 살해하는 것은, 벤과 해미에 대한 이해가 완료된 시점임과 동시에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한 순간이다. 그리고 아마 종수의 소설이 완성되는 때이기도 하다.


벤을 살해한다는 것은, 벤의 정체와 해미의 욕망을 이해하는 것과 등치이며, 그것은 다시 사회의 법과 질서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과 등치이다. 종수가 벤을 살해하는 것은, 그러므로 종수의 사회화 과정이 완료되었음을 뜻한다.(이 모든 과정은 종수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종수는 해미를 욕망하고, 해미는 벤을 욕망한다. 종수의 세계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관객의 눈에 해미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해미가 파주의 노을과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을 배경으로 한껏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추었을 때, 종수의 눈에는 남자들 앞에서 옷이나 벗어대는 창녀로만 보였다. 적어도 해미에 대해서만큼은 관객의 시선과 종수의 시선이 비껴나 있다. 그렇다면 벤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종수가 본 벤은 ‘재미’를 욕망한다. 그런데 그 재미는 2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벤의 재미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다.


메타포라고 발화하는 벤에게 해미는 메타포가 뭐냐 묻는다. 벤은 종수에게 물어보면 알 거라고 말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해미는 물론 종수도 메타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다. 마을 근방의 모든 비닐하우스를 다 확인한 후에야 종수는 메타포를 이해한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게 직언이 아니라는 걸. 그 은유를 어떻게 의미화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세상이 수수께끼인 건 세상이 모두 은유이기 때문이다. 은유를 이해하지 못했던 종수에게 세상은 수수께끼였다. 그 은유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자기만의 세계관을 정립한 사람이 된다. 그것을 나는 ‘사회화’라 썼다.


관객의 시점에서 해미의 실종은 삶의 의미의 실종을 뜻한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끝내 알 수 없다. 종수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어쨌든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벤이다. 이는, 종수가 재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지 말지는 택할 수 있으나, 의미를 쫓는 삶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실종과 살인은 다르다. 실종은 나에 의해 일어난 게 아니며 끝내 알 수 없는 사태로서, 부재의 표상이다. 살인은 나에 의해 일어나며 내가 알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영역으로, 수용의 기표이다. 이로써 종수는, 끝내 삶의 의미를 알 수 없고 오직 재미를 추구하는 인물로 성장한 셈이다.


이것이 이창동이 이해하는 오늘날 이대남의 모습이다. 진짜 질문은 여기서 시작한다. 이창동은 어떤 아버지였나. 이창동이야말로 영화 속 종수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이창동 또한 한국사회의 법과 질서에 저항해온 386세대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그렇다면 종수는 이창동의 아들이다. 지금의 이대남들은 386의 아들이다. 이창동은 과거 386들의 저항이 불러온 현 사회의 공허함을 그렸다. 젊은 이창동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제스처가 종수를 낳았다. 그러므로 <버닝>은 감독의 과거에 대한 자기 반성이다. 이제 우리가 기대할 것은 반성 이후의 모습이다. <버닝> 이후 이창동은 어떤 영화를 들고 올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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