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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Jan 27. 2023

'나'라는 고유명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 2] 정리

‘탐구’ 시리즈를 쓰고자 했던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의식은, 춘추전국시대 공손룡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공손룡은 자신이 타고 다니는 말(horse)은 ‘말’이 아니라고 고집했던 사람이다. 공손룡에 따르면 이 글을 쓰는 나는 ‘사람’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사람’이 아니다. ‘말’이나 ‘사람’이라는 건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공통의 속성을 지닌 개체들을 묶어서 퉁치는 인식이다. 나를 ‘사람’이라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두가 다 마찬가지다. 대상을 명칭으로 부르고 인식하는 순간부터 그 대상의 상당 부분이 깎여나가고 왜곡된다. 가령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라고 했을 때 그때의 ‘사람’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평균적인 속성과, 우리가 지향하는 사람으로서의 이상점을 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 중요한가, 지금 내 눈앞의 사람이 중요한가. 당연히 내 눈앞에 살아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늘 머릿속에 든 추상적인 개념으로 현실의 모든 대상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공손룡은 그러한 인간들의 태도를 문제 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인식과 대상이 언어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했다. 가능하다면 그는 언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었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10대 때 철학책을 읽으면 거기엔 죄다 ‘이 나(this me)’가 빠져있다고 느꼈단다. 그러다 문학이 ‘이 나’를 다루는 분야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공부해 보니 철학이나 문학이나 모두 ‘이 나’는 빠져있더란다. 2500년 동안의 서양철학은 ‘보편’에 대립하는 ‘개별’을 다루면서 마치 그 ‘개별’을 ‘이 나’처럼 다뤘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 나’란 앞서 공손룡이 말했던 것처럼 그 어떤 언어로도 포섭할 수 없는 대상 그 자체를 가리킨다. 가라타니는 그것을 ‘고유명’이라 칭한다. 대상을 ‘개별’로 대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런 거다. 우리는 사과를 먹으며 사과를 과일의 일종이라 여긴다. 개를 보며 동물의 일종 혹은 포유류의 일종이라거나, 반려동물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고등어를 식품의 일종이라든가 바다생물의 일종으로 여긴다. 가라타니 본인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자신을 인간 또는 일본인의 구성원으로 대하거나, 학자로 대하거나, 남자로 대하거나 어떤 식이든 다 상위 개념의 한 갈래가 될 뿐이다.


나와 너를 ‘인간’으로 묶는 순간 나와 너의 공통점만 남고 차이점은 소거돼 버린다. ‘인간’에 포함되는 개체가 많아질수록 탈락되는 차이점은 늘어간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문제의식은 해체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20세기 서양철학에서도 이미 논의되어 오던 것이다. 데리다나 들뢰즈 등은 기존 철학을 동일성의 철학이라 부르며 차이를 강조하는 철학을 구축하려 했다. 그런데 가라타니가 보기에 그들의 시도는 지난 2500년 동안 서양철학이 걸어온 길의 동어반복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들이 ‘보편’을 반대하며 들고 나오는 것이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처음이 아니다. 사실 서양철학의 역사 자체가 ‘보편’과 ‘개체’ 간 논쟁의 역사다. 하지만 ‘개체’를 사고하는 것은 결국 ‘보편’을 전제하는 것밖에 안 된다. 나라는 ‘개체’를 말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이라는 ‘보편’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이런 점에서 달라”라고 말할 때의 ‘나’ 또한 결국 ‘보편’으로서의 인간 개념에 반사된 특수성을 조명할 뿐이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부터 중세 유럽의 리얼리즘과 노미널리즘 대결, 근세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논쟁이 모두 ‘보편’과 ‘개체’의 대립이었다. 헤겔은 대립을 통해 자신을 쇄신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변증법) 가라타니가 보기에 대립은 그저 메트로놈처럼 양끝을 왔다갔다 할 뿐이다. 그래 가지고는 메트로놈의 사정 범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비유하자면 동전의 앞면을 부정하기 위해 동전의 뒷면을 얘기하는 셈인데, 그런 식으로는 동전 자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데리다나 들뢰즈 등의 해체주의 또한 불가능한 작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은유로서의 건축]에서 충분히 다루었다.


그렇다면 ‘보편↔개체’라는 이항대립적 사고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이 ‘고유명’ 자체를 인식하는 태도다. ‘고유명’의 속성을 ‘단독성’이라고 가라타니는 언급한다. 그리고 ‘단독성’에 대립하는 것이 ‘일반성’이다. ‘보편↔개체’를 극복한 사고가 ‘일반↔단독’이라는 사고다. 전자가 ‘공동체’적 사고라면 후자는 ‘사회’적 사고이다. ‘공동체’와 ‘사회’는 전혀 다르다. 이것은 가라타니가 전작들에서도 꾸준히 언급했던 발상이고, 가라타니 본인도 밝히듯 들뢰즈에게서 가져온 것이다. 그동안 철학‧사회학‧정치학에서 언급해온 ‘사회’란 실은 ‘공동체’였음에도 그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가라타니는 지적한다. 들뢰즈 본인조차 엄밀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들뢰즈를 포함해 그간 학자들이 ‘일반↔단독’이라는 사회적 사고에 실패하는 이유는, 그것을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회’란 ‘공동체’ 바깥을 말한다. 우리는 각각의 존재/대상을 ‘공동체’ 안에서 생각한다. 앞서, 개를 포유류의 구성원으로 보는 사고는 생명과학이라는 ‘공동체’ 내부의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생명과학을 믿지 않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개를 포유류의 일종이라고 사고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만의 전혀 다른 사고 체계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가라타니가 말하는 ‘공동체’란 단순히 마을‧도시‧국가 같은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질서 체계가 다 ‘공동체’다. 대표적인 ‘공동체’는 언어일 것이다. 한국어‧중국어‧영어 모두 다른 ‘공동체’다.


여기서 흔히 저지르는 인식론적 오류란, ‘사회’를 ‘공동체’ 바깥이라고 했을 때 한국어‧중국어‧영어 등을 모두 포함하는 언어 일반을 ‘사회’라고 생각하는 실수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가라타니가 말하는 ‘사회’는 그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한국어라는 ‘공동체’ 대 언어일반이라는 ‘사회’는, 다시 ‘개체’와 ‘공동체’가 되어버린다. 공동체적 사고의 컨트롤씨 컨트롤븨일 뿐이다. ‘사회’란 모든 ‘공동체’를 아우르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가라타니가 말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인식론적으로는 그것을 규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존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지로 그리기도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나 ‘고유명’은 인식론적 차원이 아니라 논리적 차원에서만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철학자들은 상당수가 ‘사회’와 ‘고유명’을 인식론의 차원에서 다뤄왔기에 번번이 실패했다. 대표적인 게 경험론자들이다. 그들은 ‘고유명’을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한정했다. 흔히 ‘고유명’에서 중요한 속성이 물질적인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도 착각이다. 오히려 ‘고유명’은 관념적인 레벨에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소크라테스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를 생각한 이는 데카르트였다. 가라타니는 여기서도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열심히 설명한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는 의심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가 ‘공동체’ 바깥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랑스에서 통하던 상식이 프랑스 밖에서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각 국가나 지역에는 고유한 관습과 에티켓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 지역을 벗어나면 무용지물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데카르트는 의심했다. 자신이 그동안 ‘생각’을 해온 건 줄 알았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그건 단순히 ‘공동체’ 내의 질서와 관습을 따른 것이었다. 자신의 사고(思考)라는 게 혼자만의 주체적이고 독특한 내면이 아니라 모두가 따르는 공동체의 질서였던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그 의심은 ‘공동체’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공동체’ 바깥을 가봐야 알 수 있다. 그런데 바깥이란 게 진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또 다른 ‘공동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자꾸만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그것을 ‘신’이라 결론 내렸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신은 종교적인 신이 아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불러도 상관없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나중에 그 신을 인격신으로 혼동하고 만다. 그것이 데카르트의 불찰이었다고 스피노자는 지적했다. 데카르트가 ‘관념’과 ‘개념(=표상)’을 혼동해서 구별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스피노자는 ‘관념’과 ‘개념(=표상)’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가라타니 식으로 말하자면, 관념은 단독성 즉 ‘고유명’에 해당하고, ‘개념(=표상)’은 ‘개체’에 해당한다. 관념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고, 개념/표상은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관념은 논리적인 레벨에서, 개념/표상은 인식론적인 레벨에서 다룰 수 있다.


애초에 데카르트의 신은 관념이었다. 논리적인 존재였다. 그랬던 것을 스스로 인식론적 레벨로 전치시켰다, 아마 이것이 데카르트주의를 탄생시킨 오해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데카르트주의는 데카르트를 근대적 주체의 탄생으로 사고하는 이념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의심하는 주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근대적 주체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둘은 대립하는 위상에 있다.


스피노자는 주체 개념 자체를 부정한다. 말 그대로 그것은 ‘표상’이라고. 인간이 주체적이라고 느껴지는 건 모든 인과관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세계 그 자체다. 세계는 그 생성의 원인도 변화의 원인도 스스로 지니고 있다.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건 번짓수를 잘못 짚은 거다. 스스로 정해진 룰에 따라 움직이므로 주체적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그 룰이 너무 복잡해서 인간이 다 알지 못하는 것뿐이다. 스피노자가 도출한 이 신이야말로 가라타니가 생각하는 ‘사회’와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 신이야말로 세계종교에서의 신이다. 그 신은 ‘공동체’의 신을 모조리 찢어버렸으니 말이다.


스피노자는 당연히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도 부정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데카르트가 주체에 도달한 이유는, 데카르트는 ‘관념’과 ‘개념’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신은 논리적으로 ‘관념’이어야 함에도, 데카르트는 논의의 끝에서 신을 마치 인격신처럼 서술하고 논리를 전개한다. 그때의 신은 ‘개념(=표상)’이 되어버린다. ‘개념(=표상)’으로서의 신은 ‘공동체’의 신과 같은 레벨이다. 그때의 주체란 다른 구성원과의 차이일 따름이다. 그 차이는 동일성을 제외하고 남은 찌꺼기다. 그러므로 주체는 ‘공동체’의 거울상이 되고 만다. 나에게서 인간이라는 ‘개념(=표상)’의 공통된 부분을 빼고 남은 부분, 그것이 나의 주체인 셈이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의미의 주체가 아니다.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주체성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주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공동체’적 사고이므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와 ‘개체’를 극복하고 ‘사회’와 ‘고유명’과 마주할 수 있는가. 가라타니는 그 가능성을 루소에게서 찾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폴리스적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폴리스는 ‘공동체’의 일환이다. 그는 인간이 본래 ‘공동체’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가라타니는 그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제를 의심한다.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하고.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게 아닐까. 인간은 맨 처음부터 ‘공동체’ 밖에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에 구속된 게 아닐까. 비슷한 생각을 루소가 먼저 했었다. 인간은 태어날 때에는 어떠한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았다. 언어를 배우지 않은 인간 아기는 어떠한 언어라도 배울 수 있는 상태다. 가라타니는 그 아기의 상태에서 바로 ‘사회성’을 도출한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상태다. 그때에 아기는 그 어떤 공동체에 속한 자와도 편견없이 소통할 수 있다. [탐구 1]처럼 말한다면, 아기는 어떤 언어든지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모든 언어를 다 습득할 수는 없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고 나면 가능성은 닫혀버린다. 아기는 이제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가 되어 있다.


프로이트도 루소와 같은 생각이었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 존재(=모세)인데 ‘공동체’가 그러한 인간의 ‘사회성’을 억압한다고 말이다. 그것이 문명 발전의 과정이다. 실은 ‘사회성’과 ‘공동체성’이 대립 관계였는데, ‘공동체’가 ‘사회’를 억압한 다음에 애꿎은 자연과 대립하는 척한다. 현대인들은 문명(=공동체)의 대립을 자연이라 생각하지만, 문명과 자연은 실은 동전의 양면이며, 문명(=공동체)과 진짜로 대립하는 것은 ‘사회’이다. 그런데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신경증의 형태로 말이다. 세계종교는 인간의 억압된 ‘사회성’의 귀환이었다(프로이트는 종교란 집단 신경증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귀환한 본성은 다시 억압될 운명을 지녔다. 지금의 세계종교는 그 ‘사회성’을 잃고 ‘공동체’의 종교로 귀착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은 그 대표적 예시이자 증거이다.


다시, 어떻게 ‘사회성’을 찾을 것인가. 우리는 더 이상 아기가 될 수 없고, 세계종교는 변질됐다. 사상은 철학으로 전락했다. 실제로 ‘공동체’ 바깥이라는 공간은 없다. 공손룡의 해법이 언어 바깥으로 나아가라는 것, 즉 다시 아기가 되라는 것이었다면, 가라타니는 그 방법도 허상이라며 반대한다. ‘공동체’ 밖은 또 다른 ‘공동체’이다. 남은 방법은 이것이다. 자신이 ‘공동체’ 속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 태도야말로 ‘사회’적인 것이다. 주의할 점은, 우리는 ‘사회성’이라는 속성 자체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항상 ‘사회’적일 수 없다. 다만 ‘사회성’을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가라타니가 말하는 윤리이다.


안타깝게도 [탐구 2]를 출간하고 가라타니는 예정된 [탐구 3]를 쓰지 못한다. 그의 논의는 일차적으로 여기서 멈춰버렸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는 [탐구 3] 대신 [트랜스크리틱]을 내놓는다. 그 스스로도 자기모순에 처해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가라타니는 ‘사회’와 ‘고유명’을 논리적인 레벨에서만 논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실패는 예정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 길은 이미 괴델과 데리다가 걸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스스로도 [은유로서의 건축]과 [탐구 1]에서 하나의 닫힌 계에서는 논리적으로 창발성을 도출할 수 없다고 비판하지 않았던가. ‘공동체’ 내부에서 ‘사회’를 고안해낸들 논리적인 길로는 그 ‘사회’에 도달할 수 없다. 논리로는 외부 세계로 길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탐구 2]를 출간하고 가라타니도 그걸 깨달았던 거다. 그래서 이 시기에 그는 길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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