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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이 Oct 05. 2024

그을려도 사랑이기만 하면 괜찮을까?

영화 <그을린 사랑> 다시 읽기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을 보고, 지독한 모성애를 느꼈다거나 숭고한 사랑을 느꼈다는 세간의 감상과 평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명백하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화소를 차용한다. 이는 굉장히 위험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저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정동은 너무나 확실한데 그 확실함은 불쾌함의 끝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수단으로 삼아 모성애나 사랑을 전달한다? 이는 너무 조악하다 못해 최악이다. 3류는커녕 폐기처분감이다. 왜냐하면 가부장적인 관점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두 개의 시선이 부딪혀 폭발하기 때문이다. 창녀와 성녀의 만남. 쓰면서도 역겹다. 이렇게 해석하고도 <그을린 사랑>이 엄청난 명작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이들은 포르노에 뇌가 절여진 게 아닐까 스스로 의심하길 바란다.


오히려 영화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던 건, 왜 굳이 자식 모두에게 진실을 알려야 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것도 살아서가 아니라 죽고 나서 말이다. 내가 자식이었다면 앞으로 살 날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반대로 내가 부모였다면, 죽고 나서 유언으로 진실을 알리기를 택했을까. 나는 무덤까지, 저승까지 비밀을 가져갔을 것 같다. 부모로서도, 자식으로서도, 너무 처참한 고백이다. 진실이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내 사랑을 고백하는 게 그토록 소중한가. 듣는 사람이 고통스럽든 말든 내 사랑만 전하면 되는 걸까. 진실이라는 도그마에 빠진 광신도가 아니고서야..


이 대목에서 나는 어쩌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떤 굴레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왜 영화가 택한 배경이 이슬람교인지 이해됐다. 모든 종교가 그렇겠지만, 이슬람교는 특히 지켜야 할 도그마가 많다. 비무슬림이 보면 이슬람은 굴레투성이다.


영화의 원제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없다. 그냥 'Incendies=화염'이다. 이슬람들은 종파를 나눠 서로를 불태운다. 같은 종파 안에서도 각자의 도그마를 지키려 또 상대를 불사지른다. 마찬가지로, 어머니 나왈도 진실과 사랑을 전하려다 자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두 자식이 어머니의 유언을 집행하기까지의 과정이 구조적으로 종교 의식과 동형인 것으로 보인다.


일단 어머니는 살아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실이 전달되는 건 죽음 이후다. 그때 이미 어머니는 없다. 부재한 어머니는 일종의 신의 자리와 같아지고, 그의 유언은 계명과 같아진다. 물론 신을 믿지 않는 것도 자유이듯, 계명을 따르지 않는 것도 자유이다. 그런데 종교의 흥미로운 점은, 아예 처음부터 종교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게 된 상황에서 그 종교를 거부하고 어기는 데에는 모종의 죄책감과 책임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그냥 0인 것과 1-1=0인 것은 천지차이다. 결국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기로 한 딸 잔느는 그 유언을 실행시키기 위해 어머니가 살았던, 다녀갔던 장소를 똑같이 뒤밟는다. 이는 마치 성지순례와도 같다.


영화의 배경은 레바논이다. 레바논의 영토 이미지를 검색해 보면, 좁은 나라가 참 세밀하게도 나뉘어져 있다. 종교와 종파에 따른 지역 구분이다. 그들끼리는 여전히 내전을 치르는 중이다. 바깥에서 보면 종교라는 이름으로 서슴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사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이라고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는 악마가 아니다. 서로 믿는 진리가 다르고 자신의 진리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갈등이 악화된 결과다. 비무슬림의 입장에서 그들을 손쉽게 악마화하는 건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진리를 명목으로 마을과 사람들을 잿더미로 만들긴 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 나왈 또한 자신의 진리와 사랑을 알리기 위해 자식들의 마음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나왈에 대해서는 숭고한 사랑, 우주를 초월한 모성애라며 치켜세우면서, 이슬람을 두고는 전통과 도그마에 빠진 폭력적 야만인이라고 욕한다. 이것은 모순이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 <그을린 사랑>은, 나왈의 선택을 통해 이슬람의 갈등을 생각해보고, 반대로 이슬람의 갈등을 통해 나왈의 선택을 곱씹어 보라는 건 아닐까. 무언가를 악마화하기는 쉽듯, 반대로 무언가를 신격화하는 것도 편한 선택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선에는 너무 많은 맥락들이 깎여나간다. 영화 제목 '그을린 사랑'의 방점은 '사랑'이 아니라 '그을린'에 있음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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