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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남자 Sep 25. 2015

같은 글, 다른 생각.

우리는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태풍같은 시국이 앞을 다투어 우리 곁에 오고 있는 요즘입니다.

누군가는 많게 누군가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이 모든 것들을 치부하고 살아갈지 모르겠지만, 중요한건 우리 삶 앞에 그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사로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적고자 하는 글은 제목과 마찬가지로 같은 글, 다른 해석입니다.

같은 글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A라는 뜻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B라는 뜻으로 그 경우의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글이라는 것은 다양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명령어나 사실을 전달, 상대방의 동의를 얻기 위한 글이라고 한다면 다르겠지요. 


 유난히 요새 들어서 많은 사람들과 해석의 차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해지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대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 입장에서 인지를 하고 전달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 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철 스님의 유명한 답문인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의 경우입니다.

앞 구절에 있는 '산'이라는 단어, 

하나의 기의와 기표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 선상에서 사람들이 떠올리게 되는 산은 각기 다른 산일 것입니다. 그 이미지를 듣는 것만으로도 백두산, 설악산, 한라산을 떠올리거나 자조하는 입장에서는 최근에 등반을 했던 산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는 국가마다 역시나 다른 경우가 존재할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의 연결고리가 제각기 다름으로 인해서 오히려 산이 갖고 있는 실체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즉, 산에 대한 각각의 기준이 충돌함으로써 산 이라는 의미 자체가 갖고 있는 Kommunikat는 그 방대함이 측정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에 자아와 타자 간의 구분 짓기가 되어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뒷 구절에 있는 물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철스님의 지위에서 한번 해석을 해볼까 합니다.

결국 위에서 산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각 개개인에게 다양한 사고의 연속성과 형평성에 고려해 각기 다른 시각에 다른 의미로 다가 온다는 것. 언어를 통해서 실체를 지향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산이 갖고 있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산이라는 그 실체를 의미 그 자체로 초월하는 의미가 기려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의 의미가 개개인의 해석으로 이어지게 되면 세상에 분열과 마찰만 조장하기 때문에 이를 초월하는 의미로서의 산. 산이라 지칭되어지는 그 의미의 태초로서의 의미를 얘기하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



공자



 이어서 다른 의미로 더 풀어볼까 하는데요, 이 글의 취지와 부합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의미로서는 공자의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자왈: "유! 회여지지호?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공자께서 자신의 제자 안회에게 가르침을 주는 구절입니다.

“안회, 내가 너에게 앎이란 무엇인지 알려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참된 앎이다.“ 

 바로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 더 나아가 그것을 그대로 말로 옮길 수 있는 실천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위 해석과 다른 점은 받아들임에서 더 나아가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셸 푸코



 또 다른 측면에서 해석해보겠습니다.

산 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언어적인 측면에서 산이라는 언어 자체가 다분히 기호자체로 우리에게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가상 데이터입니다. 유구한 철학의 역사에서 보게 되면 최근의 논리로 해석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셸 푸코의 저서 ‘말과 사물’을 보게 되면 ‘유사성은 오히려 오류의 계기로 전락한다.‘라고 명시합니다. 즉 사유는 사물들을 서로 근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서로 구별하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위의 해석을 다시 성철스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산이라는 가상 데이터로 실재의 산을 내포할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언어의 조합으로 자연에 실재하고 있는 산을 말하기에는 어림없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얘기하자면 인간의 의식자체가 갖고 있는 모순, 이 모순을 근거로 한 분리로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인식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설파하려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상을 통한 실재를 의식하는 인간의 한계. 


 이쯤 되면, 이게 무슨 소리야? 보다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까 싶은데요. (지극히 주관적임^^;)

그럼 가상과 실재의 구분이 뭔데? 라고 말입니다.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가상에 대한 실재를 부추기는 고정관념으로 이글을 끝내지 않기 위해서는 이 물음에 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철 스님




 본론 앞부분에서 산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각각이 받아들이게 되는 다양성을 언급했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개봉했던 인터스텔라에서 비슷한 상징적인 영화의 흐름들이 나옵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기초한 영화이기에 더욱 시공간이라는 설정과 흡사한 비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가상을 통한 실재는 결국 본질 그대로 탐구하고 인식해야 바로 그 본연의 뜻, 진리로 다가가는 단계적 절차인 것입니다. 이러한 가상과 실재, 자아와 타자간의 구별이 무엇으로 출발하는지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에 선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흔히 구조의의에서 말하는 ‘자신의 욕망은 곧 타인의 욕망이다.’ 라는 말과 같이 나와 타자간의 경계선상으로써 계속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말이 어려운 것 같지만 뜯어보면 실재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 본질을 먼저 들여다 볼 것이며, 수단에 국한되지 말 것, 나와 타자간의 다양함 역시 그 바탕은 본질을 인식하는지에 대한 의미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해석은 바로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에 가깝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과적 의미의 해체주의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




 반면 제가 받아들였던 의미는 이와는 또 다릅니다.

있는 그대로 볼 것이며, 시각적, 청각적으로 내가 전달받은 정보 외에 그 어떤 것도 이 의미와 해석에 끼워넣지 말 것. 간단히 말해서 양념을 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서 누군가에게 이것을 시키면 이때까지 이만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던가 지난번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하겠지? 등 그 본연에 새겨져 있지 않은 의미를 넣어서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 고로 이 말이 제게 의미하는 것은 바로 ‘과유불급에 가깝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모두는 지속적으로 많게 혹은 적게 문제점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입니다. 편린적으로, 자조적으로 과도한 배려로 인해 오히려 본질이 곡해되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가 일어난다는 그 자체는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문제에 대한 상대방의 태도를 보자면 나 라는 객체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상황들이 만연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긍정의 아이콘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상황을 좋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큰 틀에서 자신의 삶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앙띠 오이디푸스이 '질 들뢰즈'




 다양한 형태로 우리는 소통의 부재라는 현실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려해도 상대방이 막기도 하며, 내 말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형태. 그로 인해서 누군가는 고통 받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합리화함에 있어 막힘이 없습니다. 위 글의 해석에도 담겨 있듯이 존재의 일의성, 즉 차이가 하나의 존재를 만들어냅니다. 누군가는 이렇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저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 시간들을 내가 수십 년을 살아낸다고 해도 쉬이 변하지 않습니다. 


 변증법과 해체주의의 반복을 예로 들어볼까요?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독일 관념론 철학을 완성시킨 근세의 체계적 형이상학자입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엄청나게 싫어했던 사람으로도 유명하죠.


이 헤겔의 변증법은 부정성이 항들을 관계해 종합된 새로운 항으로 발전하게 해준다는 매커니즘을 바탕으로 합니다. 반면 질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의 세계는 그 차이로 인해 부정되지 않고 그 자체로 반복되면서 생산을 하게 됩니다. 차이는 반복에 거주하는 것으로 반복은 무엇보다 시간적 개념, 즉 되풀이 되는 시간이며 주어진 상태들의 긍정을 그 조건으로 합니다.

그로 인해 완성된 위대한 문구가 있습니다.

“삶은 반복을 통해 형성된다.”



정신현상학의 저자 'G.W.F 헤겔'





 삶은 결국 혼자 살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아등바등하고 누군가와는 티격태격하고 그런 시간들을 끊임없이 보내는 것이 나라는 사람이 여물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내가 살아내는 이 거대한 삶의 구심 속에 타인과의 문제는 지극히 미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이라는 이 격정의 세월에 있어서는 모두가 흘러가는 시간일 뿐이며, 문제에 대면해서는 최선을 다하되 휘말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차이 역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름으로서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살아가며 반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진리를 찾아 평생을 바쳐왔습니다.

그런 스님의 마지막 뜻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이 진리, 그 자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어느 곳에 극락이 있는가? 그 불국토를 찾아 수없이 헤매도 결국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토록 찾아헤메던 불국토이자 내 자신이 진리였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전 어떤 종교도 믿지 않습니다. 온전히 내 자신에게 집중되어진 삶. 그 삶이 바탕이 되어야만 나 스스로에게 전념할 수 있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동서양 어떠한 가르침도 저는 편하게 받아낼 수가 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 어떠한 모습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미래의 언젠가 나는 괜찮은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목적의식이 없어도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유쾌합니다. 스스로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면 상관없지만 꼭 자신의 삶을 옥죄어 살아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의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죄의식을 끌어내고 그 죄의식을 단죄하고.... 그저 모든 행위는 번거로울 뿐입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 그 가치가 스스로에게 숭고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살아내려 한다면 그 뿐입니다.




삶이란 단지 우리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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