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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남자 Sep 07. 2015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휴머니티의 극에 다다르다

러시아가 낳은 인류 최고의 문학 거장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그가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을 꿰뚫어보는 통찰에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해 잘 알았던, 그 이상은 마치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그는 humanity의 極에 다다른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인간을 잘 알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죽음,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동안 그런 아버지마저 그 폭력성으로 인해 거꾸로 살해당하는 비극. 이어지는 밑바닥 생활들. 이후 급진적 정치 모임으로 체포되어서 사형을 언도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시베리아에서의 유배생활까지...

이 모든 삶이 그의 소설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라마조프家의 형제들, 지하로부터의 수기, 가난한 사람들, 죄와 벌, 백야, 백치, 악령, 노름꾼, 미성년....

그 밖에도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제가 접해본 작품들은 위에 열거한 정도이고 그 소설 한 작품 한 작품마다 삶의 정수가 녹아있습니다. 영화 ‘Once’와도 너무 닮은 작품인 ‘백야’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치 Archetype을 창안한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착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담은 ‘백치’에서는 당시의 심정이 가득 녹아있습니다. 백치에서 드러나는 이 감정을 좀 더 시적이고 극적인 표현으로 느끼고 싶으신 분들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죽음에서 건져 올린 삶의 한 부분을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하는 책은 위 작품들 중에서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인 ‘카라마조프家의 형제들’입니다. 어렸을 적 러시아 원서로 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집에 있었는데 어마어마하게 두꺼웠고 알아볼 수 없는 상용문자가 잔뜩 적혀있던 걸 본 적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어를 공부하다 말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 원서는 읽을 수 없지만 어렸을 적에는 무작정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책입니다. 좋아하는 우선순위는 아니며, 그의 생을 통 틀어서 유일한 미완성의 작품이라 한번 다뤄보고 싶을 뿐임을 알려드립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심층 심리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라는 존재의 비극성에 대해서 통찰하고 있으며, 넋의 리얼리즘이라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분석함으로써 근대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많은 사변적인 주제 가운데서도 특히 대심문관 부분에서 다루고 있는 신과 구원의 문제는 이 소설의 가장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 만으로는 살 수 없다.‘ 는 그리스도의 말을 둘러싸고, 인간의 자유와 본질에 관한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인류의 점진과정에 대한 깊은 긍정 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계시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기이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가장인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인색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정욕의 포로이자 극도의 이기주의자입니다. 그의 인생관은 극히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는 인생의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육체적 쾌락을 목적으로 삼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재산을 축적해 나갑니다. 이에 비해 막내아들인 알료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사라고 불립니다. 그는 종교적 순결성과 정신적 무구성을 대표하는데, 그의 곁에는 종교적 달관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조시마 장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카라마조프 부자의 성격이 모든 인간의 온갖 특징 가운데서 어느 일면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찌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장남 드미트리를 둘러싸고 모든 사건들이 펼쳐지는데 실질적인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왕성한 생활력과 강렬한 정열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직한 마음과 순수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모순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동요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 둘째 이반은 교활하고 탐욕스러우면서도 이지적인 면을 지닌 무신론자로 그는 소설속에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극단적인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인물들의 특징은 생애를 통해 작가를 괴롭혀 온 사상적·종교적 문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사색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러시아인적인 야성적 정열과 순수함을 갖춘 장남 드미트리, 무신론자에다 허무주의적 지식인 차남 이반, 수도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동포애를 가르치는 조시마 장로에게 심취한 순진한 3남 알료샤로 정리할 수 있으며, 여기에 물욕과 음탕의 상징인 아버지 표도르, 거기에 아버지와 백치의 여자거지에게서 태어난 막내아들 스메르자코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父子間 및 형제간의 애욕을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국내 개봉 포스터




 

소설의 외면적 줄거리는 아버지 표도르의 살해를 둘러싼 심리적 갈등 위에 이루어졌으며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는 긴밀한 구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미트리는 부친 살해의 혐의를 받고 재판도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지만, 실은 간질병의 특성을 알리바이로 이용한 스메르자코프의 범행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반의 사상적 감화를 받고 저질러진 일인 것입니다. 이 소설의 진짜 내면적인 줄거리를 이루는 것은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철학으로서, 이반과 알료샤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 사이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상징하는 알료샤의 더럽혀지지 않은 영혼을 서로 빼앗으려는 형태로 전개되는 사상적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자의 공감은 조시마 장로 측에 기울지만 신이 창조한 세계의 불합리와 모순에 관하여 역설하고, 이 모순이 있는 한 미래에 다가올 지상의 천국도 인정할 수 없다는 이반의 반론이 훨씬 박력 있게 다가옵니다. 특히 중세기에 지상에 재림한 그리스도가 교권에 의하여 거부되었다고 말한, 이반이 지었다는 극시 大審問官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정수로서 현대에서의 권력과 자유의 문제를 조명하면서 마치 노스트라다무스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대머리 율 브린너가 드미트리로 열연합니다



 

“우리 각자는 모든 사람 앞에서 모든 사람에 대하여 유죄이며 내가 다른 이 보다 더 그러하다.”

“내 일평생에 대해 스스로를 응징하노라, 내 일생을 벌하노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할수록 더 죄인 같이 느껴지는 이 느낌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일 겁니다. 거짓은 몇 겹으로도 두를 수가 있겠지만 진실은 언제나 하나이며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타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철학적 기여를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내용 중 '곰은 사납고 위험한 짐승이긴 하지만, 그것은 결코 곰의 죄가 아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인종차별 문제의 예를 들면 흑인인가 백인인가 하는 것은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현상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한 인종차별적 편견을 지닌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흑인이거나, 장애인이거나, 고아이거나, 못났다는 등등의 이유로 삶의 회의에 빠지고, 생의 의욕을 상실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 것일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적처럼, 그것은 결코 그 당사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사회구조, 잘못된 이데올로기 조작, 잘못된 환경오염 등이 그와 같은 개인적 불행을 초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이유도 없이, 태생적 우연 때문에 고통받는 불우이웃이 있다면, 이는 당연히 사회 전체가 해결해야 할 공통의 책무인 것입니다.


또 반대급부의 행복을 만끽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개선하는 일에도 모두들 동참의 발걸음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는 결코 불행 속에 있는 당사자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살맛나는 세상이자 인류 역사가 부단히 꿈꿔온 최고의 유토피아이기 때문입니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통렬한 삶이 간직한 인간에 대한 사유는 어떤 부분들이 있을까요?

현대에 사는 우리는, 왜 아직까지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고전을 읽고 있는 것이며, 그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사실, 문학의 세계는 우주만큼이나 무한하며,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임의적으로, 주제, 구조, 문체, 기법, 스토리, 시점 등의 잣대를 통하여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며, 우리가 선택하는 그 해석을 자칫 현대라는 시대에 갇혀버린, 편협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또 하나의 해석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 해석은 아마도, 언제나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로 자기 존재를 투시하고, 이 인생이란 엄청난 수수께끼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고 그리하여 이 세계의 허무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신과 세계와의 단절 앞에서 공포에 떨고 전율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고,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사유가 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확신보다는 오히려 이쪽, 저쪽으로 흔들리는 영혼의 의혹을, 한 사물에 대해 전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을 유보하는 법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를 읽으며 보통 그의 사상성 즉, 이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신, 자유, 복종, 양심의 문제와 알료사,조시마 장로를 축으로 하는 사상의 대립에 주목하게 됩니다. 사실 이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사상들의 총체이며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점에 주력하는 건 역시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보이는 이것이 다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면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천착하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이반은 왜 회의하는 것이며 드미트리는 왜 그렇게 타락과 절망의 심연 사이를 오고가는 것이며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행로는 왜 하나같이 고뇌에 가득찬 순례인 것인지...

그것은 바로 그들이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며 질서정연하고 반듯한 세계가 아닌 불합리하고 질척거리는 이 세계에 실존하고 있는 인간인 까닭입니다. 이 소설에서 방대하게 펼쳐지고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의 전개와 대립은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이런 인간이라는 운명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며 사실상 이 소설 자체가 무질서하고 복잡하게 얽힌 인간세계를 나타내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까라마조프家의 형제’에서 그 인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자면 먼저 드미뜨리. 그는 음탕하고 탐욕스러운 아버지 표도르와 마찬가지 기질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지만 아버지가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일면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가



 

그렇다면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도대체 어떤 이들이란 말일까요?

드미트리와 이반은 과연 전적으로 사악한 인간이며 알료사는 전적으로 선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저마다의 모순과 혼돈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으며 드미트리는 비록 타락한 인물이지만 그의 순진무구함과 단순함으로 인해 오히려 투명하게 보이며 인간성이라는 것이 사실은 안정. 질서, 조화, 통일에 가깝다기보다 오히려 그 배후에 폭풍이 휘몰아치듯 암흑의 신념과 부동의 관습의 베일에 저항하는 이율배반이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드미트리는 선과 악 사이에서 불균형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이반은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창조한 이 세계가 너무나 불합리하기 때문에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신에게 반항하고 있으며, 알료사는 신앙의 흔들림과 유혹속에서 고뇌를 맛보게 됩니다. 즉 드미트리 자신이 바로 ‘선과 악의 투쟁의 장‘이라는 것을 선포한 바와 같이 인간 영혼이라 불리는 저 신비로운 곳이 바로 욕망과 야망이 뒤엉키고 우정, 사랑, 증오, 의심의 승리와 패배, 고통이 엇갈리는 전장 이상의 어떤 곳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물들의 이런 내적요소 못지않게 이 소설의 외적인 사건전개 역시 지나치게 다양하고 무질서하게 드러납니다. 실제로 이 소설을 읽을 때 아주 급박하고 순간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전개에 따라서, 일정한 속도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차례의 폭풍 뒤, 또 다른 폭풍우와 바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사실상 단순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한 장소에 모든 인물들을 등장시켜 마치 그들의 생에 있어서 어떤 결단을 내리려는 듯 그들을 대화하게 하며 이러한 사건의 전개는 아주 복잡하게 굴절되어 있어서 결국 독자는 각 인물들이 처한 내면의 투쟁과 아울러 그 투쟁에서 파생되는 서술상의 혼 란, 그리고 공간상으로는 전쟁을 치르는 듯한 인물들 간의 소란스런 교차로 인해 이 소설은 하나의 아비규환 같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내외적 투쟁은 끊임없이 대화에 의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 작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지하로부터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도스토예프스키 전 소설들 간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한 문장을 보면,

"그렇지만 여러분 이제 내가 무언가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고 있다고 당신들은 생각 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다. 필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언 하거니와 설사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나로서는 개의할 바가 아니다." 

위의 지문에서 알 수 있듯이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화자는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당신들은 무엇 무엇이라 생각하겠지‘ 하며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의 응수를 예상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수기의 화자는 '지하 생활'로 상징되는 혼자만의 공간에서 타인과 고립된 채 살아가는 인물이지만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그 대화가 이 소설 제 1부의 거의 모두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흐친은 이것을 자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즉, 지하 생활자의 의식 속에는 자기 자신을 비춰주는 전혀 다른 자의식들이 존재하고 자기 자신조차 때로는 의식하지 못했던 이런 분신들이 내면에 숨어있기 때문에 단 몇 마디로 그 인물의 성격이나 관념을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신의 예는 까라마조프家의 형제에서 이반 까라마조프와 스메프쟈코프를 들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드미트리나 이반, 알료사 그들 모두를 어떤 한 쪽의 성격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실은 이 자의식과 닿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자의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떠한 주인공도 인습적인 방법으로 최종적인 말로 단정 지을 수 없게 하며 그들을 어떤 일정한 사상이나 관념의 절대적 대변자로 되게 하는 힘을 박탈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품속의 인물들 모두가 이 자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주인공만이 주체가 되고 오직 그의 언술만이 중심이 되며, 주변 인물들은 배경으로서 처리되는 단성적 소설과 달리 각 인물들 모두가 의미 있는 언술의 주체가 되며 그들은 모두 완전히 동등한 자주적 권리와 독립적인 의식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로 간주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그토록 첨예한 사상의 대립을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이반의 무신론적 사상이, 혹은 조시마 장로의 사상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이런 자의식이 각 인물들에게 자신의 창조자의 동등한 입장에서 그에게 순종하거나 때로는 반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도록 허락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대화가 갖는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각각의 인물들에게 독립성과 내적 자유와 미종결성과 비결정성을 인정하는 방법이 바로 이런 대화적 입장이기 때문인데 이런 대화적 입장이야말로 앞에서 언급했던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이나 까라마조프家의 형제의 각 인물들에게 자의식을 토대로 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서로 투쟁하는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며, 또한 외부적으로는, 즉 플롯상으로는 작중인물들을 함께 모이게 하여 그들을 갈등 속에 서로 충돌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품의 모든 주인공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의식이 그들로 하여금 의식 속에서 자신과 타자와의 대화를 나누게 만들며 그러므로 그들은 그 대화 속에서 서로 만남으로써 저 내면의 끊임없는 고뇌와 더불어 시간과 영원을 동시에 간직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서로 대립되는 다양한 의식이나 목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대화적 관계를 가지며, 대립하고 있는 두 개의 극이 서로서로 만나고 상대방 속에서 자신을 보고, 서로서로를 비추어주고, 서로서로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랑은 증오와 얼굴을 맞대고 살면서 증오를 알고 이해하며 또한 증오도 사랑과 밀착하여 사랑을 알고 이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이 소설은 그자체가 하나의 모순덩어리와 같은 인간세계, 인간 내면을 표현하고 있으며 여기서 각 인물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자의식을 통해 인간내면의 비합리성과 복잡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들은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혹은 타자와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자신이 완전한 하나의 주체로서의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각 존재들은 이러한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현장 속에서 그칠 줄 모르게 인간내면과 외부세계와의 투쟁을 통해 고뇌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에서 어느 것 하나도 단 하나의 주제로 제한하거나 그 주제를 완벽한 엄밀성으로 완성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점 외에도 현대에 사는 우리가 이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을 하나의 그 무엇으로 완결시키기 보다는 이 소설을 자신가운데 그대로 머물게 하면서, 각 인물들 간의 그리고 소설 모든 요소 요소들 간에, 각 존재와 존재의 충돌을 통해 열려진 관계를 속에서 압도적 진폭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게 하면서 각 인물들 사이의 세계를 열어 세우고 그 세계의 열림이 끊이지 않도록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비종결성을 통해, 이 소설이 우리 앞에 놓고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저 세계의 은밀한 쇄도가운데 속할 뿐이며 그것이 종래는 극락정토가 아닌 인간 세계, 저 수많은 번뇌가 존재하는 이 지상 세계를 닮았음을 깨닫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선과 악 사이에서 불균형하게 흔들리고 있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는데요 그렇다면 과연 이 지상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사실상, 이 지상에 있는 동안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그 주인공이 타인이 끼치는 영향력으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자기 자신의 세계로 돌파해 나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스스로의 이미지를 파괴하고, 훼손하려는 그 궁극적이고 필사적인 노력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입니다. 여기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로 비록 너와 나의 만남이 지속불가능이고, 그 만남 속에서의 고독과 허무가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지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간은 서로 만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는 그 만남 속에서 결국, 독백이 아닌 대화를 통해, 서로의 영혼과 영혼이 부딪칠 때 , 그 찰나에, 영원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시마 장로가 ‘지상의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진리와의 접촉’을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이며 결국 우리는 그런 사랑을 통해 그가 말하는 ‘이 지상에서의, 마음속의 천국’을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 그것은 바로 하나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각 원소로 환원하려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드미트리와 이반, 알료샤의 영혼이 그들에게 주어진 고뇌의 무게를 제대로 감내하지 못하여 분열하려할 때 그것을 막는 것,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한 쪽 끝을 흔들면 그 반향이 곧 세계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한 알의 죽은 밀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속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대지에 확고하게 발을 디디고 서 있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 이 소설에서 각 인물들의 타락은 참으로 가볍지만 그들의 고뇌의 무게는 참으로 진실하고 땅에 더 가까운 것이며,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들에게 감히 그 무거움과 가벼움, 어느 하나가 옳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길 위에서 대지를 딛고 서 있으며, 그 길 위에서 어쩌면 신기루일지도 모를 하나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끝은 보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그 길을 걸어 나가는 일, 그 투쟁, 그 고뇌는 여전히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이 파편처럼 녹아있는 이 작품은 인간에 대해, 인간 존재의 비극성에 대해 치밀하면서도 거대하게 조망하고 있습니다. ‘죄와 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쩌면 인간의 내면과 그 영혼은 바로 보고 있는 유일한 작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 내면이 갖고 있는 온갖 추악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의 작품을 읽어내는 것은 사실상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작품에 끝도 없이 나를 투영하게 되고 나를 소설위에 올려놓 나 자신의 모습은 얼마나 거리가 있는가 스스로 반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모순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는 것,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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