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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남자 Sep 04. 2015

삶의 목적과 행복,
어느 것이 우위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계속 회자되고 있는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참 오래도록 인간의 생각을 지배해 오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 왜 살아가는 것인지

이 질문은 적어도 인간이 알타미라 동굴의 벽에 그림을 그려 대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터넷으로 전 세계와 손쉽게 소통하는 지금까지 한 순간도 삶의 화두에서 크게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사람들이 다른 이유들을 갖고 살아가고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머리가 하얗게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의 직업에 따라, 위치에 따라 해야 할 것과 소명, 사명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 삶을 제대로 인간답게 잘 살다가 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평범이라는 단어가 비범으로 탈바꿈하면서 누구도 평범하게 살기가 점점 힘들어져가는 현실 속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만이 유일한 인간다운 삶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단 저만의 생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가득한 동화이야기는 이제는 비극적인 소설과 영화로 대신하고, 폐부를 날카롭게 할퀴는 암울한 감정들에 시달리다 사라진 비극적 인물들의 존재와 그들이 보내온 시간들은 역사로 남겨져 새삼 인간의 존재와 가치 그리고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서 끝없는 의문점들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삶의 기저를 꿰뚫는 근본적이고 날카로운 이 질문에 인류는 다양한 시간과 계층 속에서 각자의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만, 만약 이 질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질문에 관해 가장 오래전에 체계적인 논지를 펼쳤던 한 학자의 이야기에도 큰 관심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해온 천동설을 부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비판,

천체망원경을 개발한 근대 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이 갈릴레오  

서양 학문의 시초에 가까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근대 과학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과학의 영역에서 갈릴레이를 필두로 한 과학자들로부터 시련을 당한 바 있지만, 철학 등 지식과 사고에 관련된 분야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함께 지성사의 시초라 불려도 좋을 만큼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플라톤(대머리)과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구한 지식 분야는 물리학·화학·생물학·동물학·심리학·정치학·윤리학·논리학·형이상학·역사·문예이론·수사학 등 매우 다양합니다. 가장 큰 업적은 형식논리학과 동물학 분야의 연구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학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지만, 19세기까지는 관찰과 이론 면에서 그의 연구를 넘어선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철학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단논법론은 이제 형식논리학의 작은 부분일 뿐이지만, 그의 윤리학·정치학·형이상학·과학철학 등은 현대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는 50여 권에 육박합니다.

이중 제가 읽었던 책들은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변증론, 레토릭, 형이상학, 시학 이렇게 되는데요 여기서 정치학, 시학, 니코마코스 이렇게 3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3대 저서라고 불리는 책들입니다. 사실 형이상학의 시초도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철학적의제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위의 3권이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사상을 드러낸 저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입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질문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명제에 대해서 오랜 시간동안 라이시움에서 강의를 진행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게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 입니다.  



‘니코마코스’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윤리학이란 ethica의 번역어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문을 통칭합니다. 

이 책은 인간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과 이 행복은 인간의 고유한 기능이 탁월하게 발휘되는 품성 상태인 덕에 따른 활동임을 논증합니다. 인간만이 합리적 선택에 따라 자신의 욕구를 목표에 대한 숙고를 통해 조직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인간은 자신의 지적인 활동에 있어서나 용기나 절제와 같은 윤리적 품성 일반에 있어서 또 사회적 관계에서 발휘되는 덕인 정의나 우애를 함양해 나아갈 수 있다고 서술합니다. 제대로 이해된 쾌락은 인간의 고유한 활동을 증진시키고 완성시키기에 인간이 가진 이 고유한 기능들의 최선의 활동들은 즐거움을 통해 완성됨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기능이 얘기되는 모든 측면에서 덕에 따른 활동을 통해, 특히 인간 안의 가장 신적인 부분인 지성의 관조적 활동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사상사적 중요성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면 이 책을 통해서 헬라스 고전 철학이 보여준 도덕적 세계관의 완성적인 형태로서 인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고유의 방법을 가지고 주어진 문제에 관한 일상적 이해로부터 플라톤주의자를 비롯한 선대의 연구 의견까지 분석의 터전을 마련한 후 그 안에서 취할 것과 가려낼 것을 골라 가면서 하나의 종합적 체계를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행복에 도달하는지 그 과정에서 필요한 앎이 무엇인지에 관한 포괄적이고 체계적인 이해를 이 작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후 고전 그리스 세계는 급속한 몰락의 길을 가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통찰에 근거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사유방식은 이후 서양 중세의 그리스도교 사회가 12세기 중반 이후의 본격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의 결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작품을 알게 되고 그때까지 유일하게 타당하던 그리스도교적 삶의 방식에 대한 심각한 도전임을 이해하는 대목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규정하고 품성적이고 지적인 방식의 인간 완성을 얘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이해에 대해 초인간적이며 의지적인 방식의 인간 완성을 주장하며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윤리적-신학적 세계관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 시기의 심각한 논쟁의 결과 근대 윤리학은 인간의 행복 문제를 신학의 고유한 논의 영역으로 여길 정도로 타격을 받았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인간적 영역 안에서 행복을 논의하는 방식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재발견하기에 이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일관되고 가치 있는 믿음체계를 검토하는 삶을 중시했고,

플라톤은 올바름이란 지혜, 절제, 용기가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하는 상태이고,

좋아 보이는 것과 좋은 것을 구별할 수 있도록 철학적 훈련을 하여야,

가치 있는 삶과 존재의 이유를 나타내며 이것이 좋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덕을 통한 관조적인 삶, 이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프로페서 마이클 샌덜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덜 프로페서  

당금 유행했던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인용될 정도로, 윤리문제의 관점을 법칙주의, 공리주의 윤리관에서 인격의 형성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 삶 전체의 내러티브로 확장한 덕 윤리학의 명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행위의 목적인 최고선, 즉 행복의 추구라고 보는 그의 논점에 따라, 행복, 중용과 덕, 정치적 사려, 쾌락과 우래 등을 순차적으로 정리해 윤리학이 갖고 있는 실천적 성격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만년의 가장 원숙하고도 구체적인 사색이 드러난 철학서로서 인류가 보유한 위대한 산실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신학적이고 초인간적인 지평 없이 인간의 삶의 궁극 목적과 행복을 얘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놔둔 채 지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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