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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남자 Sep 21. 2015

비우고 다시 채우고,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일상의 소담

참 오래도록 저는 제 삶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간 열심히 술 마시고, 나름 다른 형태의 문화 활동도 열심히 한 듯합니다.

일 때문이긴 해도 일본에도 다녀오고 매일 와인을 몇 병씩 사서 마시면서 머릿속에서는 수도 없이 무언가를 주저리 주저리. 책도, 그 밖의 과거의 취미생활도 정리하고, 그렇게 그렇게 제 삶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던 것들을 많이, 참 많이도 정리했습니다. 


특히 책들을 정리할 땐 미묘한 감정들이 오롯이 올라오곤 했습니다.

수많은 책들 중 3,000권 정도를 정리하면서 애틋한 감정들이 느껴졌습니다.

지난날, 내가 이 책을 어디서 구입했었는지, 책은 어땠는지, 그러면서도 보내야 하는 아쉬움, 마치 지난날 사랑하던 사람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있다가 결국은 사진도 편지도 정리하면서 보내야 하는 것처럼, 그것이 위하는 길임을 깨달은 것 마냥... 그렇게 시리게 보낸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삶의 방향성을 정해주고, 제가 너무도 아끼는 책들은 여전히 제가 보유하고 있지만 마치 한 쪽 팔이 잘려나가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책장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느낌이라기 보단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고 생각하는 일련의 논리형성에 크게 기여한 친구들이기 때문에 한없이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돌아가는 누군가에게 반드시 다시 한 번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 


제 짐이 너무 여기저기에 놓여져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갖가지 집안 사정과 맞물려서 치우게 됐기 때문에 사실상 제 의지는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제 짐들을 한 자리에 놓아보니 엄청났습니다. 프라모델, 레진 킷, 이 작품들을 완성할 아크릴과 각종 도색 물품, 이젤, 미술도구, 엄청난 양의 농구화, 헤드기어, 글러브, 마치 운동선수라도 되는 것 마냥 여기저기 GYM의 트레이닝 복, 보드게임.... 뭐 전부를 나열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것들을 한 번에 정리했습니다. 어쩌면 다시는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치우면서 하나같이 다시 한 번 보는 기회는 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만해도 차로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치웠으니 말입니다. 하나 하나 보는 것은 참 모든 것들을 선명하게 만들어줬습니다. 그때의 나, 그 시절의 내 생각, 당시의 가치관....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선명해지는 기억 앞에서 지금의 나는 참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는 것을 많이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구하는 것도, 가치를 느끼는 것도... 이제는 너무도 다른 사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느끼고 있음을 말입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으려다가 혼자 정리한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곁에 그대로 있었으면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고, 수 년 혹은 수십 년 뒤에나 알 수도 있었을 것들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그 빈자리는 아마 또다시 다른 것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기 원하며, 새롭게 관심 갖게 되는 것들로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것들은 지금과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비워내는 것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나.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을 좋아했으며, 꿈이 무엇이었는지 말입니다.

그러면서 거듭나겠지요. 부족한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고...

다만 정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사람은 누구라고 하더라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편협해집니다. 무엇이 정말 좋아지기 보다는 싫어지는 것에 대한 구분만 명확해질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가 좋고 뭐는 싫어가 아닌, 내가 추구하는 것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신념. 



지금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지금이 있게 되었는지.

과거의 열정, 신념, 노력, 미래에 대한 헌신.

그 기억들이 모두에게 늘 함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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