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 다운 길을 찾는 여정의 시작
인류가 시작한 역사는 참으로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의 겨우 한 줄 정도에 지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인류 기원에 대한 시각은 모두들 아시다시피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론, 다른 하나는 다윈의 진화론입니다.
창조론을 근거로 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아담이 탄생하던 시기인 날로부터 2014년인 올해까지 정확하게 6,040년이라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중입니다.
진화론을 근거로 한다면 최초의 인류 출현은 약 300만 년 전, 아프리카 초원에서 출현한 것을 최초라고 명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879년 발견된 알타미라 벽화는 지금으로부터 1만 5천 년 전에 그려진 동물의 그림입니다. 그을음이나 지형의 변화로 인해 생기지 않고 순수하게 그려냈다는 것은 이미 판명이 모두 난 사실입니다. 과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동물이 있지 않은 이상 아무래도 진화론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현생의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의 아종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15만 년 전에 나타난 현생인류를 포함한 인류들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크로마뇽인도 이에 속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직립보행과 간단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던 30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우리말로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최초의 도구로 나무가 아닌 돌을 사용했던 200만 년 전의 인류 호모 하빌리스, 자의로 불과 언어를 사용했으며 약 170만 년 전의 인류인 호모에렉투스, 시체매장을 시작했으며 내세관을 갖고 있었고 슬기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20만 년 전의 인류인 호모 네안데르탈시스, 프랑스 크로마뇽 지역에서 발견된 3만 년 전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크로마뇽인까지, 이렇게 인류의 진화를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타미라 벽화나 라스코, 풍부한 사냥과 다산의 주술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발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모두 크로마뇽인 세대에서 출현한 것들입니다.
이런 무구한 역사 속에서 언어의 사용으로 인해서 지식이 발달하고 문화가 생성되는 순환에 의해서 지금도 인류는 지속적인 성장을 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음식을 보관하다 우연치 않게 생긴 와인의 역사도 섞여 있으며, 그림, 글, 음악 등 우리가 실재 즐기는 모든 것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시대는 무한질주하면서 시시각각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더 이상 학업과 자신의 올곧은 함양을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닌 편협한 지식을 습득해서 패스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막 사회에서 내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을 접하고 방황하면서 보내온 젊은 날의 이야기들은 후에 혁신의 아이콘이 되지만 여전히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 버거운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고 있을 뿐입니다. 나 자신 외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젊은 날 보내온 시간에 만연해져서 쉬고 즐기며 사는 것이 사유를 대변하듯이 가장 풍족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불어 살지만, 혼자서는 버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스탕달의 ‘적과 흑’이라는 작품을 접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저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던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해 이문열의 ‘삼국지’를 읽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월탄 박종화 선생님의 ‘삼국지’를 다시 보면서 해석의 차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상기해보면 관우를 죽게 만든 사람이 여공이냐 여몽이냐를 두고 친구들과 나름 설전을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즐거움을 끄는 것은 다른 부류의 책들에 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에서는 티라노 사우르스의 탈출로 쫒기는 부분을 읽어 내려갈 때면 손에 땀을 쥐고 긴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무렵 가장 좋아했던 책들은 로빈 쿡의 의학소설이었습니다. 코마, 브레인, 바이탈사인, 죽음의 신, 돌연변이 등 생각해보면 엄청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보니 글이 자조적인 추억의 정서가 되어버렸는데, 암튼 정리해보면 접하긴 했어도 관심을 두기는 힘들었으며 더 정확하게는 ‘관심이 없었다’ 가 맞는 것 같습니다. 세계사 시간과 국사 시간을 통해서 접하는 히스토리는 좋았고 각각의 이름들을 기억하는 건 좋아했지만 익힐 생각도 없었고 읽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좋아했던 책이라고는 그나마 그리스 신화를 좋아했었고 영웅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가 제가 알고 있던 세상의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논설시험 준비한다고 읽었던 월간지 독서평설로 주둥이만 살아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학업에 이것저것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군대에서도 미래의 진로를 고민하느라 책 한번 제대로 접해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보내던 시간은 2002년, 2권의 책을 접하게 되면서 독서의 힘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라는 글귀로 유명한 노자의 도덕경입니다. 명상록은 구절 구절 나눠져 있어서 읽기가 쉬웠고 도덕경은 원문의 발췌(일부)와 해석이 섞여 있어서 쉽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제 작년에는 도덕경의 원본인 도경과 덕경을 따로 따로 읽는 것도 도전했으니 세월의 흐름 속에서 같은 말이어도, 같은 글이어도 무수히 많은 깨달음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저 아는 척에 불과했던 책 읽기는 시간을 거듭할수록 스스로의 사유를 파고 들었으며, 체계적으로 훈련을 하고 시간 시간을 활용해서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노력을 해오게 됐습니다. 여전히 깊이가 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글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무엇이 나에게 작용·반작용이 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수준에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들은 사실 부류로 따지면 철학서와 정신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양한 류의 독서를 하는 이유는 다변성과 다양성에 있습니다. 소설가들 역시 철학적 사상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서 글의 전개방식과 문체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세상 어느 것 하나라도 철학적이지 않은 것이 없고 인간의 정신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 다양성 안에 다름이 존재하고 각각의 사유의 표현이 달라지고 결코 틀린 것이 없는 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미카와 준페이의 소설 ‘인간의 조건’과 앙드레 말로의 소설 ‘인간의 조건’, ‘왕도로 가는 길’을 통해 드러나는 사유는 인간이 어떻게 더 인간다울 수 있는지, 그 길이 따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물음이 들어있으며, 각자의 사유는 각각의 방식으로 나타내어집니다.
여성 비하에 대해서 나름의 일목요연함을 갖추고 있는 세네카의 ‘인생론’과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은 철학서답게 그 방식을 강요하고 있으며, 그로인해 회자되고 있는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 현대에까지 고하는 방식이 수없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견해에 대해서는 사유의 종말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날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휴넷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나 강신주 교수, 최진기 등 요새는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혜민 스님의 책 등 그 다양성이 날로 더해지고 있는 최근입니다. 힐링과 사유의 중간에서 무수히 많은 형태의 컨텐츠가 나오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문학의 과다한 상업적 이용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인문학을 바르게 접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해설서 기준이 아닌 인문학의 원본 해설서를 일독하시기를 추천합니다. 인문학이라는 생소하고도 다양한 장르에 딱히 해설서라는 것은 없습니다. 누구라도 추천을 하면 자기 기준에서 밖에 추천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책이던 그 책 안에 포함되어 있는 머리글과 들어가는 글, 추천글과 주석 등을 통해서 어느 정도 책의 맥락을 잡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생소하더라도 그렇게 읽어낸 책은 뿌듯함과 동시에 다시 읽었을 때 당연히 좀 더 쉽게 다가오게 됩니다. 단순한 줄거리를 섭렵하기 위한 독서가 아닌 작가가 이 글을 써내려간 배경과 그 흐름을 어떻게 풀어 나가는지, 나에게 와 닿는 구절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큰 맥락에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사전을 찾아 읽는 정성스러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읽다보면 각 장르마다 비슷한 요소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헤겔의 변증법적, 리비도, 유물론적 사고관, 사고와의 결별‘ 등등의 단어들은 의미를 찾아보고 자신만의 정리노트로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게 단어의 출현 서적을 정리하다보면 역사관과 철학적 잉태가 어디서 왔고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꼭 그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치 지도를 보듯이 많은 부분이 정리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문학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제 생각의 실천이성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의 생각이 과거 누구로부터 전해져 왔으며, 내가 멘토로 삼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고방식과 어디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아냄으로써 자신의 향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까지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잘 알게 된다는 얘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수준이 높게 형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찰력이 생기고 순환원리와 비순환원리의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유기적인 시선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바로 사유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서양 인문학의 경우 너무나도 유명한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가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권장도서 목록에 일리아스, 오딧세이아 순서대로 나열이 되어서 나와 있기도 합니다. 제 기준에서 보면 남성 위주의 스토리와 전쟁에 관련된 나름의 복잡한 구조와 이야기를 갖고 있는 일리아스는 카베르네 쇼비뇽에 가깝고, 읽어내려가기 쉬운 오딧세이아는 피노누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 일리아스는 분명 끝까지 읽기가 쉬운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후 그리스 로마 서양의 고전들을 읽는데 일리아스라는 선행독서가 이후 독서에 지대한 영향을 주듯이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미 주변에서도 수없이 인문학 읽기에 실패한 사례들을 무수히 봤기 때문에 적절한 접근을 원하신다면 오딧세이아를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많을 것으로 사료 되는데, 책에도 나오지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니코마코스윤리학이 그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치학과 니코마코스윤리학은 한 쌍의 작품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정치학이 원론이라면 니코마코스윤리학은 그 개론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개론서를 보고 원론을 보는 것이 덜 딱딱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나 니코마코스윤리학 같은 책을 읽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책이 바로 위에 언급했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두 작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읽기 위해서는 어떠한 선행독서가 필요할까요? 바로 스승인 플라톤과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이해하지 않으면 난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시다시피 책이 없습니다. 그저 말로만 전해져 온 것들이 대부분이고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에서 대화의 상대로 소크라테스를 출현시키기 때문에 플라톤이 온통 소크라이펙트를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장 유명하면서 참고할만한 작품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플라톤의 ‘국가’를 들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는 플라톤의 ‘국가’를 언급하고 비판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국가’에서도 ‘정치학’처럼 문예비평에 관한 글이 나오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데도 참고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철학서를 읽음에 있어서 스스로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철학을 전공으로 할 것도 아니고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닌데 이런 글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서양 학문의 영향권에서 교육을 받아온 우리 세대들에게는 아주 친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이라는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들은 조금만 들으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거나,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와인을 좋아하는 우리들로서는 서구인들이 갖고 있는 상식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읽어야 할 책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줄 문구로 많이 사용하는 좋은 글귀로 논어나 사기, 제자백가의 사상 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또 삼국지에서도 고사성어가 많이 등장을 하는데 이런 글들에서 다뤄지는 정보나 에피소드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면 신문이나 기사 등을 읽어내려 가는데 막히는 부분이 등장을 할 수가 있습니다. 고사를 연계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비슷한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선행독서라는 것 역시 끝도 없습니다.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읽고 두 작품을 전후한 시기의 서사시와 3대 비극작가의 33편의 비극작품, 플라톤 등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동양에서 사서삼경, 삼국지 등 고사성어가 회자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식으로 알고 있지 않으면 깊이 있는 독서가 힘들 듯이 서양의 고전들을 연계하는 독서를 하지 않으면 이해도도 떨어지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인문학인 만큼 그런 과정들이 반복되어서는 이걸 왜 읽고 앉아있나 하는 회의로 얼룩진 시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글이 길었습니다. 바빠 죽겠는데 장장 1시간도 넘게 글을 쓰고 앉아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글을 읽어주시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의미가 있는 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인문학 안내서 1권 읽고 마치 인문학을 모두 끝낸 것 마냥, 그것이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시기 보다는 정확한 순서에 입각해서 인문학이라는 넓디넓은 세상에 입문해보시길 바래봅니다. 인문학은 우리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자양분이며 비록 키를 더 크게는 해줄 수 없지만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혼자 즐기는 밤이 계시다면 최고의 와인 안주로 인문학 한 권 장만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초보자를 위한 책 읽어주는 남자가 추천하는 인문학 입문서
서양 인문학
1.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2.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3.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4. 빌헬름 뮐러의 ‘겨울 나그네’
5. 아르튀르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동양 인문학
1. 김부식의 ‘삼국사기’
2. 김시습의 ‘금오신화’
3.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4. 장자의 ‘장자’
5. 묵적의 ‘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