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두 번째 이야기
오늘은 지난 ‘인문학을 시작하자’ 그 두 번째 시간을 준비해봤습니다.
많은 분들이 인문학을 딱딱하다고 생각들을 하십니다. 그저 어렵고, 누가 읽는다고 하니깐 나 역시도 마련해서 서재에 몇 권쯤은 갖고 있지만 뽀얗게 먼지만 쌓일 뿐 선뜻 꺼낼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겁니다. 한번 읽어볼까 하는 마음에 꺼냈다가도 몇 날 며칠씩 시선이 가는 자리에 있다가 청소를 할 때쯤 다시 있던 자리로 가버리시는 걸 경험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수없이 실패를 많이 한 케이스입니다. 어린 놈이 건방지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삶에는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혹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한 번도 겪지 않을지도 모를 사건만 최소 몇 번은 됩니다. 이쯤 되면 ‘혹시?’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상상을 초월한다 정도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데 이 얘기를 왜 할까요? 제가,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주를 이룰 이곳에서 말입니다. 바로 오늘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하는 순간 달라진 삶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살다 보면 수많은 도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무직에서 고배를 마시고 육체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입시에서 목표에 미치지 못해서 부족하다 느끼는 학교를 가야 할지 아님 재수를 해야 하는 것인지, 오래도록 만나던 사람을 나 외에 다른 이유로 헤어져야 하는 것인지, 관심도 없는 전공을 통해 입사한 회사에서 더 이상의 동기부여를 느끼지 못할 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더 이상 내게 아무런 감응을 주지 못하거나 이게 더 이상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참 많고 다양한 이유들이 이 세상에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들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참는 것도 선택일 거고 과감한 단절 또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누군가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서러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온전히 내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큰 범주에서 본다면 아주 작은 편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비난은 결국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괴롭게만 합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크게 2가지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내게 유리한 것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면 선택으로 인한 그 선택되어지는 대상 혹은 사물로 인해서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완만한 합일점 등을 찾느냐/내 주어진 조건에 부족하지만 만족할 것이냐 등입니다. 누구나 스스로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도덕적인 것을 부각하여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어떤 선택을 하기 까지 과연 어떠한 과정이 있었나에 대한 회고가 필요함을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우리 모두는 선택하는 순간 고민을 합니다. 선택이 불러올 결과와 그로 인한 나의 위치 혹은 상대방의 위신, 생과 사의 순간에 다가가듯 아주 빠르고 치열하게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는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선택의 순간을 한참 전부터 예측하고 있을 것입니다. 몇 년 혹은 몇 달, 며칠, 몇 시간 전 등 급작스런 상황이 아니고선 한번쯤 생각해보고 고민해봤던 문제에서 다시금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렸더라도 과거 아리송한 문제를 놓고 보기 중 2개를 체크해놓고 시험지를 끝까지 보고 다시금 보면서 최종 결과를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험의 예를 들었으니 이어서 얘기해보자면 얼마 후 답을 맞혀보면서 그 결과를 알게 되고 다른 틀렸던 문제들보다도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문제를 틀렸던 것에 대해서 더 많은 회한이 들게 됨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아주 어렸을 적, 보기 좋고 내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선택합니다. 돌잔치에서 돈을 집었다고 혹은 마이크를 집었다고 해서 그 아이들에게 선험적 판단 혹은 무의식 중 리비도의 현상으로 부모의 생각이 전달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택을 하는 방식도 선택을 하게 되는 계기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아이들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사고로 스스럼없이 고를 수 있을 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성장의 과정 속에서 좀 더 많은 생각들이 경우의 수로 떠오르게 되고 그런 선택의 순간들은 추후에 있을 선택의 과정 속에서 선험적 기준으로서 각 개인에게 잣대를 제공하게 됩니다.
흔히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최초의 선택은 명확합니다. 이렇게 혹은 저렇게 두부를 썰 듯 선명하게 선택을 베어냅니다. 문제는 돌아서서 다시금 떠올릴 때입니다. 갑자기 걸리는 것들이 생각납니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보지 않을까 혼자서 고민을 시작합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순간이 되면 선택의 종착지를 골라줬으면 하는 마음보다는 ‘내가 이렇게 선택했는데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사전적 선택의 확신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선택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회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예측보다는 과거 본인이 경험했던 선험적 기준이 절대치를 좌우함은 변함없는 진실입니다. 예외의 경우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극히 드물고 옳은 방식으로 쌓아 올린 선험적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그 역시도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이언스지의 각종 논문에서도 여러 번 봤던 기억이 있는데 선택의 순간 최초의 선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경우는 3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모든 경우인 67% 중 약 89%에 해당하는 선택이 후회를 한다고 합니다. 반면 최초의 선택을 고수한 무리는 약 94%가 탁월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리서치도 근거는 될 수 있지만 진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이와 관련해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얘기는 선험적 기준의 절대치를 믿으시라는 겁니다. 즉 최초 어떠한 불순물도 없이 순수하게 그 문제만을 바라보고 끝에 이른 자신의 선택을 믿으시라는 얘깁니다. 치열한 고민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치열하면 치열한 만큼 더 많은 근거와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선험적 기준의 절대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스스로를 믿고 내가 걸어온 길을 부정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무엇보다도 나란 사람이 걸어온 성정을 믿는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틀린 선택은 없습니다. 오직 다른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멈춰 서, 생각하고 자신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수행, 그 끝에는 힐링도 있다.
밤마다 저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사념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두서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루에 6만여 가지 생각을 하며 그중 95%는 어제 했던 생각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밤새 사람들은 걱정과 두려움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은 지나가지 않고 쌓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의 지층으로만 쌓인다면 그 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가끔 아주 힘들 때면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대체 얼마나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렇게 끝도 없는 걸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동들이 꼭 그에 맞게 보상으로 돌아오진 않습니다. 때로는 부족하게 때로는 넘칠 정도로... 중요한 것은 힘들 땐 도미노 현상처럼 여기 저기서 작던 크던 지금의 상황으로 인해 지친 스스로를 기댈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생겨나곤 합니다. 맹자님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근골을 힘들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게 하고 곤궁하게 하며, 어떤 일을 행함에 그가 하는 바가 뜻대로 되지 않게 어지럽힌다. 이것은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을성 있게 해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함이다.’
사실 살아오면서 이 말이 와 닿는 순간이 저에게는 시도 때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참고 또 참고, 다시 눈 뜨면 참기부터...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잘못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의도한 바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의 처신이나 내 선택이 어떤 식으로든 조금은 상대방에게 흘러들어간 경우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른 후에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번민을 느끼고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고서야 분발을 하며, 낯빛으로 분명하게 나타나고 음성으로 터져 나온 후에야 깨닫게 됩니다. 내 의지가 아닌 것 역시 분명합니다. 현재 가능하지 않은 것을 쥐고 내 것이 아직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걸로 가슴앓이 하고 끝도 없는 고민을 이어가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옥죄고 참을 수 없는 광기를 품은 감옥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제가 그러하기에 글을 쓰면서 조금은 저 역시도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광활하지만 뱉어내지 못하면 담을 그릇이 없어서 내가 가야 할 길, 내가 살아온 성정을 잊고 혼자만의 생각 속에서 추측과 논박을 반복하며 끝이 없는 분석만 지속하게 됩니다.
정신분석학자인 니코 프리다의 말처럼 정서는 본질적으로 무의식적인 과정입니다. 풀어서 얘기하면 정서는 우리가 행동을 취하기 위한 힘을 동기 부여하고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저절로 일어나는 생물학적 과정이며 어떠한 신체적 표현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반면 감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정서를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고, 감정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론은 감정은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짐작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위의 선택과도 어우러지며 지금의 글과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구도 나 만큼일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의 심연을 통해서 본질을 꿰뚫는 감정의 연결고리를 풀어버리기 전에는 그 무엇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모든 상황이 일어날 뿐인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가 보고 겪은 것들에서 무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인생을 만드는 건 지식뿐만 아니라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경험이 인생에 흔적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사는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어지간히 만족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면 반대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 욕심이 많아서인지 여간 힘든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누구의 밤보다도 제게 주어진 밤이... 새벽을 거슬러... 길고도 길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가 아닐 겁니다. 사람이고 각각에게 주어진 마음에 닿는 것이 다르게 와 닿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자세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먼저 찾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하고
삶의 순간순간 의미를 깨달아 가고
항상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넘어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멈춰라, 생각하라!
자신의 사유에 이르러 괴로워도 그 본질을 스스로 헤아려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기를
모두에게 그런 인내와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열정이 깃들기를 바라봅니다.
추천하는 힐링 인문학
1.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2. 데이비드 실즈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3. 쥘리앵 그린의 ‘잔해’
4.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5.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6. 전혜린의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7. 에릭 호퍼의 ‘길 위의 철학자’
8.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9. 안효숙의 ‘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
10.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