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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어주는 남자 Sep 07. 2015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인간은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믿는다.

The Age of Revolution, 
혁명의 시대의 빛나는 아이콘!
     
오늘은 그 정점에 서있는 시대를 초월한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알아보는 글을 마련했습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19세기 초 독일 철학계의 주류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우상 임마누엘 칸트에게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지만, 현실이 근본적으로 비물질로 이루어진다고 믿은 동시대 관념론자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특히 관념론자 G.W.F 헤겔의 딱딱한 문체와 낙관적 철학을 혐오했습니다. 
     
칸트의 형이상학에서 현상 세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실재인 物自體의 인식불가능성을 철학의 시발점으로 삼고 자신만의 세계관을 발전시켜 명쾌한 문학적 언어로 표현합니다. 쇼펜하우어 형님은 세계란 우리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 즉 현상과 物自體. 본체로 나뉜다는 칸트의 견해를 수용했지만, 현상계와 본체계의 본질을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






여기서 우선 칸트철학에 대한 얘기를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임마누엘 칸트로 흘러 현상과 물자체 간의 차이로 반복이 됩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따르면 현실에 대한 직관, 경험과 인식은 사고력으로 주장되는 선험적인 질서형식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모든 사유는 선험적인 종합이며 사유의 질서원칙을 통한 경험적 소재의 질서인 것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학설에 의하면 경험적 현실세계는 非 본래적이고 비본질적인 존재로 이해되며 그 배후에 본래적인, 본질적인 존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풀어서 얘기하면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저마다 지각한 바를 토대로 자신만의 세계를 짜 맞추지만, 있는 그대로의 본 체계인 ‘자체’는 절대 경험하지 못한다고 얘기합니다. 즉 우리는 모두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각으로 얻는 지식은 한정된 감각을 토대로 얻은 정보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칸트 철학을 수정하고 완성하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칸트의 현상계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해당되며, 물자체의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에 해당됩니다. 의지의 세계가 심층이자 알맹이라면, 표상은 그것의 표층이자 껍데기인 셈인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내용은 이해되거나 경험되어야 하는 대상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이해하고 경험하는 기관에도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즉 두뇌가 없으면 사고할 수 없고, 위가 없으면 소화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경험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로 인한 쇼펜하우어 형님의 주장은 “인간은 자기 시야의 한계를 세계의 한계로 믿는다.”


지식이 우리 경험에 국한된다는 생각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도 ‘사람은 자신의 경험만 믿는다.’ 고 했으며, 존 로크 역시 ‘어느 누구의 지식도 자기 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쇼펜하우어가 제시하는 이유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칸트의 현상계와 본체계에 대한 해석에서 도출됩니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중요한 차이점은 쇼펜하우어에게 현상계와 본체계란, 별개의 두 현실이 아니라 다르게 경험되는 같은 세계라는 데 있습니다. 



이는 우리 몸으로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두 가지 방식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즉 그것을 대상/표상으로서 지각하는가 하면 내부/의지에서도 경험을 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 형님에 따르면, 의지의 작용과 그에 따르는 운동은 별개의 두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경험되는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부에서 경험되고,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관찰되는 것입니다. 자기 외부의 사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록 그것의 내적 현실인 의지가 아닌 객관적인 표상만으로 보게 될 뿐이지만, 세계 전체는 여전히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와 칸트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표현하는 순수한 기운은 진행방향은 딱히 없으나 현상계의 모든 일을 일으킵니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그는 공간과 시간이 현상계에 속한다고 믿습니다. 즉 형님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은 우리 마음속의 개념이지 마음 밖의 사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세계의 의지는 시간을 보내지도 인과적 · 공간적 법칙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세계의 의지란 시간을 초월하고 분할 불가능하며 우리 개인의 의지 또한 마찬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주의 의지와 개인의 의지는 동일하고, 현상계는 거대한 초시간적 · 맹목적 의지에 지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흔히 말하는 염세주의/비관주의 드러나게 됩니다. 헤겔 같은 동시대인들은 의지를 긍정적 힘으로 여기는 반면,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우주의 맹목적 의지에 휘둘린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장에 따르면 그 의지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뒤에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갈망을 해소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끊임없이 실망하고 좌절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세계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무의미하며, 행복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기껏해야 만족감을, 최악의 경우 고통을 얻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비존재가 되거나 적어도 만족을 쫒는 의지를 줄이는 것뿐입니다. 심미적 관조, 특히 음악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음악은 현상계를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는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불교의 열반 개념을 상기시켜줍니다. 쇼펜하우어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본인의 사상과 불교의 유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는 동양의 사상가와 종교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유일한 우주의지 개념에서 쇼펜하우어는 윤리학을 발전시킵니다. 형님이 다른 부분에서 염세적 · 비관적 기질을 보였음을 고려할 때 이 윤리학은 다소 놀랍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과 우주가 본질적으로 별개라는 생각이 오해임을 깨달을 경우 나머지 사람 및 사물 모두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도덕적 선이 보편적 동정심에서 생겨날 것입니다. 여기서도 형님의 생각은 동양철학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날의 쇼펜하우어





      
19세기 말에는 그가 의지에 부여한 중요성이 또다시 철학계의 화두가 되기도 했습니다. 앙리 베르그송과 미국 실용주의자들 또한 세계를 의지로 본 그의 분석에 신세를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야는 바로 심리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분야에서 기본적 욕구와 욕구불만에 관한 그의 견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융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주저에서 헤겔로 대표되는 이성 철학을 거부하고 세계를 이성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성은 두뇌현상일 뿐이고, 의지의 제약을 받는 것이며, 의지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인식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 즉 지성이 제한적인 것이며 의지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이성 또한 지성의 배후에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점은 칸트로서는 쉽게 인정할 수 없는 것일 겁니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사물들을 통해 다양하게 객관화되는데, 이렇게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를 쇼펜하우어는 표상의 세계라고 규정을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구닥다리 형이상학자입니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를 가장 내적인 곳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 
이 책은, 모든 존재의 뿌리가 비이성적인 것이라서 우울합니다. 이성의 활력에 대한 계몽의 믿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서른 살의 천재이자 아웃사이더였던 젊은 철학자의 대단한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고통의 계곡이며 인간의 사악한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그의 테제는, 철학이라는 살에 가시로 남아 전체주의라는 야만과 정치적 파국이 지배했던 20세기에 특별한 의미를 상징했습니다.



독일에서 발행된 쇼펜하우어 우표




     
여기서 책에 서술된 자살에 관한 부분을 칸트와 비교하면서 좀 더 세밀하게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다뤄지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삶에 대한 불쾌한 기대가 압도적이어서 자살을 하려는 사람은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를 자신의 최고 목적으로 여기며,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실천 이성을 고통을 피하려는 상대적인 목적의 아래에 놓는다.’ 
     
‘불행이 닥쳐서 절망에 빠진 사람을 아무리 관대하게 평가한다 할지라도, 그저 괴로움에 근거한 자살은 정당화 될 수 없다.’
 
‘고통 때문에 자살하는 것은 편안함을 위해 스스로 도덕적 삶을 영위할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살할 권리가 존재한다면, 이는 더 이상 도덕적 삶을 영위하고 도덕적 가치를 드러낼 어떠한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다.’
 
칸트의 논리에 따르면, 자살하는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이 심해도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데 자살자는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게 이 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독한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고통을 지켜보는 자에게 어떤 반성을 기회를 제공할 수 있고, 감옥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죽어가는 사람조차 혹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중환자실의 환자조차 도덕적인 행위가 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를 돌보는 다른 사람이 보람을 느끼거나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자살을 윤리적인 행위라고 보지 않았으나,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무조건 윤리적인 존재가 되라는 것은 무리라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어떤 윤리학에서는 아무리 고통이 심해도 덕을 목적으로 삼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끊는 것을 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윤리학도 그 근거를 대지 못했고, 겨우 그럴듯한 핑계만 긁어모았을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행복 지상주의가 자살로 귀결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망이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인 만족을 줄 수 없고, 모든 재산이나 행복이라는 것도 사실은 우연히 얻은 것이다.’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세계가 우리의 행복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
 
예컨대 경제의 위기 혹은 전쟁으로 인한 징집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행복한 생활을 목표로 한다면 논리적으로 자살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말기 암이나 불치병으로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상황이 존재합니다. 카드빚에 몰려 사채업자들에게 끝없이 협박을 당하거나, 빚더미에 앉아 평생을 노숙자로 살면서 빚을 갚아야 되는 팔자도 존재합니다.
 
‘고통이 너무 크고 치유할 수 없는 경우, 유일한 목적인 행복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곤 죽음밖에 없는 경우에는 자살을 권할 수밖에 없다.’
 
단지 행복한 생활이 목표라면, 자살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욕망은 무한하지만,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그 한정된 자원조차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비로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암, 희귀병, 재난, 사고 등등 내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엄청난 고통으로 자살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전혀 없다면, 생전에 '고통을 극복한 해탈'을 경험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죽음'만이 해탈인 것입니다. 어떤 고통도, 감정적 동요도 없는 부처의 경지는 사실 죽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어야 해탈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정신적인 행복을 추구한다면?’ 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인간은 체질상 그런 게 아예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완벽한 평정, 만족, 행복은 우리 인간의 본성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직관적으로 표상할 수조차 없다.’
 
오히려, 없는 행복을 억지로 추구하지 말고, 당장 큰 고통이 없다면 만족하고 살아야 함을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쇼펜하우어는 완전히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를 오독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그를 염세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저 역시도 이 글 위에서, 지난번 인문학 관련 글을 쓰면서 위의 표현을 썼지만 어디까지나 이해를 위한 부분이었고 어떤 경우에도 그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그의 작품을 읽을 때는 해설서에 너무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이렇게 왜곡되는 것은 마치 독일의 위대한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그를 철혈재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역시도 책 말미에 있는 칸트에 대한 비판은 국내에 나와있는 책 속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왜?‘ 라고 생각들 하시는지요.
     
저는 헤겔보다도 쇼펜하우어가 세계를 휠씬 선명하고 사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념론자답게 헤겔은 정신에서 모든 현상이 나왔다고 합니다. 기독교와 유사하게도 말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보이지 않는 의지의 힘이 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에 동의합니다. 그의 인생관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설명은 헤겔을 능가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쯤 되면 이 책을 읽기 위한 선행독서의 얘기가 나올 법도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여러차례의 서문을 통해서 자신의 책을 최소한 2번은 읽을 것을 부탁합니다. 또한 선행도서로 플라톤과 칸트, 우파니샤드를 읽을 것을 당부합니다. 인문학에 관련된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서양 철학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플라톤은 필수입니다. 필수! 
쇼펜하우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여록과 보유’ 라는 작품을
그의 철학적 토대를 이해하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도전하려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라는 작품을 추천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인생론’으로 알려져서 시중에 팔고 있는 그의 책도 사실 책의 원 제목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인생론, 행복론, 사랑은 없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고자 하는 장사치와 다를바 없습니다.


싯다르타와 우파니샤드




     
2007년 이 책을 원서로 처음 접했을 때, 그 난해함에 혀를 둘렀습니다. 그저 읽기가 전부인 독서. 그냥 이해하는 수준까지가 한계였던 것이었습니다.
올해 2월 초까지 저는 이 책을 총 15번 읽었습니다. 독일어로 된 원서를 읽고 싶으나 독어를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나마 번역본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꼭 완역본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나마 의미하는 뜻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아직 완역본이 없습니다.) 그저 쇼펜하우어를 간추려놓은 책들은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관련된 입문서 역시 그를 왜곡하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책을 설명한 다른 관련 포스팅 글들 역시도 엄청나게 왜곡하고 있음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교수들조차도 말입니다. 
     
배움의 깊이와 상관없이 이 책은 접근하기 힘든 난해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글들은 조금도 생략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없습니다. 쇼펜하우어 스스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자신의 사후, 본인의 책에 구두점 하나라도 빼먹고 출판되는 것을 염려했다고 합니다. 그의 철학은 읽는 주관대로 니체,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의 해석을 불러 올 수 있습니다. 
그의 철학은 그의 철학서. 그 자체로 읽어야 합니다.
     
저 역시도 그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로서의 깊이를 생각한다면 제가 쓰는 이 정도의 글은 그리 건방지다고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에서 지독한 염세주의자라고 비아냥거릴 때도 전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귀함, 인간 본연의 성찰을 목격했다는 희열 때문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인정한 유일한 천재, 오로지 이 사람에 대해서만 일급의 천재라고 일컬었던 프리드리히 니체, 자신의 사유의 선구자가 그 임을 인정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 평생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학습한 바그너와 찰리 채플린,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앙드레 지드, 비트겐슈타인이 소화한 과거의 유일한 철학자, 누구보다도 그가 위대함을 칭송하던 코플스톤, 토마스 만, 아인슈타인이 유일하게 존경하던 철학자로서....
이 글에 그의 위대함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작성하면서 늦은 시간, 다시금 그와 마주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른 무렵 제 머릿속에 각인이 되었으며, 여전히 나를 위안해주는 최고의 스승...
     
불행히도 대한민국 강단의 많은 철학자들이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혹은 제자를 자청한
이 수많은 철학자들은 숭배하지만 정작 현대철학의 시조라 할 만한 그에 대해선
비관론자라고 낙인찍어버리고 비웃음꺼리로만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저이자 실질적인 유일한 철학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써의 세계는 구석에 처박아놓고
기껏해야 그의 철학을 대중에게 알리려는 소품과도 같은 작품인 ‘인생론’  
그중에서도 몇몇 재미있는 부분만 발췌해서 ‘사랑은 없다’, ‘사랑을 위한 변명’ 
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제목으로 출판하는 책들을 보면서 느낍니다. 
이들에게 철학은 그저 돈벌이로, 진지하지 않은 그저 살기위한 수단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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