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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일영 Jun 04. 2016

차 없이 살 수 있을까?

걸어보니 알겠더라.

지난 일요일부터 차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어제로 5일째 차 없이 출근했고, 차 없이 퇴근했다. 취재도 차 없이 다녔다. 솔직히 처음에는 두려웠다. '내 차'를 처음 가졌던 게 2007년이니 벌써 10년 가까이 차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아마 차를 갖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무슨 이유로든 차 없이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게 두려운 일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삶의 다운사이징을 위해 한 번 실험해보기로 했다. 차 없이도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아무도 답을 해주지 않았기에 스스로 답을 내려야 하기도 했다. 미니멀리스트로 살아보기 위해서.


출퇴근길 전철은 드라마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소설처럼 끔찍하지도 않다.


차가 있으면 장점이 많다. 

일단, 날씨로부터 자유롭다. 더운 날, 추운 날, 비 오는 날 등등 날씨와 관계없이 차 안의 환경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차 없이 다니는 것보다 덜 덥고, 덜 춥고, 비도 덜 맞을 수 있다. 그리고 '짐'의 무게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노트북이던 책이던 짐을 꽤 많이 '휴대'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장점은 실로 놀라워서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고, 무거운 물건도 늘 들고 다닐 수 있다. 휴대할 수 있는 짐의 부피와 무게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특히, 직업에 따라 엄청난 매력이다. 연예인들은 의상을 가득 싣고 다닌다. 사진작가들은 보디와 렌즈를 종류별로 들고 다니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에게도 엄청난 매력이다. 어떤 디자이너는 노트북이 아닌 일체형 데스크탑을 싣고 다니는 이도 있었다. 


차만 있으면 이렇게 길거리에 쭈구리고 앉을 필요가 없다.


차가 있어 생긴 장점이 있듯, 차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도 있다. 

아니, '있다.'가 아니라 사실 많다. 많은 이들이 동감할 텐데, 주유비, 보험료, 세금 등등의 비용은 차치하더라도 특히, 주차는 정말 엄청난 스트레스다. 집이건 사무실이건 거래처건 취재처건 주차를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고, 주차된 차량에도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 한 번은 친구네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친구와 카페를 다녀온 사이 누군가 차에 펑크를 낸 적도 있었다. 서울은 특히 그렇다. 또 반가운 누구를 만나도 술 한 잔을 하기 어렵다. 대리운전은 정말 편리하지만, 왠지 내키지 않는다.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괜히 그렇다. 아버지뻘 기사님 옆에서 해롱거리며 앉아있기에는 아직 새파랗게 젊은 내가 썩 내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귀찮아서 잘 하지도 않고, 해봤자 자동 세차만 했지만, 세차도 사실 스트레스다. 덕분에 내가 은색 차를 탄다는 걸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많았다.


난 이런 거 못 한다. 그동안도 못 했고, 앞으로도 할 자신이 없다.


차 없이 다닌 5일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는 너무 상투적이고, 몇 가지 느낀 것이 있기는 하다. 우선 장점을 얘기하자면 먼저, 가방이 가벼워졌다. 이게 장점인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걸어보니 가방이 억지로라도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내 가방이 이렇게 무거웠는지도 사실 처음 알았다. 수첩, 리디북스페이퍼(전자책), 지갑, 이어폰, 안경, 열쇠, 담배, 라이터 외에 무엇도 가방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건 거대한 도전 정신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제는 책을 몇 권 사서 잠깐 들고 다녔는데 - 정말 잠깐이었다. 2시간 정도. 그리고 고작 5권 - 아직 읽지도 않은 책을 길바닥에 버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써놓고 나니 이걸 장점이라고 해야하나 혼란스럽기는 하다. 어쨌든 억지로나마 가방이 가벼워졌고, 미니멀해졌다. 아, 원래는 숄더백을 들고 다녔는데, 백팩으로 가방이 바뀌기도 했다. 이건 언제 또 바뀔지 모르겠다.


가방을 챙기면서 매일 아침 왠지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살이 조금 빠졌다. 

집에 체중계가 없어 정확히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미세하겠지만 살이 조금 빠졌다. 그리고 건강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5일 만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 웃기지만, 실제로 신진대사에 변화가 있다. 에둘러 한 가지만 말하자면,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침에 건강해졌다는 게 느껴진다. 


걸어서 출근하는 것 만으로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


또 다른 장점으로는,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 했던 일인데, 내가 들어가고 싶은 곳에 들어갈 수 있다. 차를 갖고 다니는 사람들도 잘 모를 테고, 차를 원래 안 갖고 다니는 사람들도 잘 모를 거 같은데, 나는 확연히 느꼈다. 내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면 절대 들어갈 수 없었을 길가의 상점, 카페 그리고 어디가 되었든, 이제는 그냥 눈에 보이면 들어갈 수 있다. 예전에는 주차를 하기 위해 블록과 골목을 돌고 신호를 기다리다 결국 못 참고 그냥 지나쳐버렸을 많은 곳에 쉽게 갈 수 있게 됐다. 그래서 화장품 하나를 사기 위해 인터넷을 뒤질 필요가 없어졌다. 출퇴근길 상점에 들어가서 들고 나오면 된다. 인터넷 최저가에 배송료를 붙이면 어차피 그게 그 가격이다. 


이제 쇼핑의 자유가 생겼지만, 와우, 쓸 돈이 없다.


시간이 남는다. 

이상하다. 이건 좀 혼란스러운 결과인데, 물리적인 출퇴근 시간의 길이 자체는 분명히 연장되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남는다. 아침에 조금 더 늦게 일어날 수 있고, 퇴근 후에 빨래를 돌리고 심지어 널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아직 원리를 이해할 수 없어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확실히 그렇다. 내 시간이 더 생겼다. 짧게 예상해본다면, 주차에 사용하는 시간이 줄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차를 가지러 가는 시간을 모두 더해도 분명 전철을 타러 가는 시간보다는 적을 텐데 여전히 이상하다. 누가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여전히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 관리가 조금 쉬워진 것 같다.


책을 볼 수 있다.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출퇴근길 전철에서 책을 읽을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운전을 할 때는 절대 할 수 없는 독서가 가능해졌다. 사실 예전에는 리디북스의 TTS를 이용해 카오디오로 책을 '틀어'놓기도 했었는데, 직접 책을 읽는 것과는 경험의 질이 다르더라.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정말 좋다. 이번 주에만 몇 권을 읽었고, 앞으로는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괜히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예상했던 장점이지만, 직접 느껴보니 더욱 큰 장점으로 느껴진다. 확실히 좋은 점이다. 


내가 쓰는 리디북스 페이퍼 라이트, 이 거 진짜 좋다.


단점도 있다. 

차를 두고 걷는 것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단점도 꽤 있다. 일단 지금 가장 큰 단점은 땀이 많이 난다. 그래서 괜히 혹여 땀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불안해진다. 그리고 얼굴이 탄다는 점도 있고 옷이 잘 구겨진다는 점, 목적지가 멀어지면 가고 싶은 마음보다 두려움이 크게 느껴진다는 것 등이 있었다. 특히 목적지가 내가 잘 모르는 장소일 때는 진짜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뭐 개인적인 차이일 수도 있겠다. 내가 특히나 길치라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옷 다리는 것도 참 피곤한 일이다.


장단점으로 나누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걷기 쉬운 차림새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구두와 면바지, 셔츠가 내가 가진 옷의 거의 전부인데 주름이 덜 가고 덜 더운 옷차림은 없을까 생각하게 됐다. 면바지를 반바지로 바꿔볼까? 구두를 운동화로 바꿔볼까? 셔츠를 더 가벼운 티셔츠로 바꿔볼까? 등등 전에 없던 고민이 생겼다.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기 위해, 다른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좀 그렇다. 지금 쓰는 백팩은 몇 년 전에 샀던 비싼 가방인데, 요즘 들고 다녀보니 어깨가 아프고 끈이 자꾸 흘러내린다. 버리고 새로운 가방을 사야 하나? 이것도 위와 비슷한 맥락으로 좀 그렇다. 


나는 이렇게 '간지'나게 모양이 나오진 않더라.


그런데,

한국에서 차 없이 다니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이고, 기분이 나빠지는 일이다. 일단 걸을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다. 그게 어디건, 특히 서울에는 사람을 위한 길 따위는 거의 없다. 침침한 내 눈으로도 확연히 인도와 도로가 나뉘어있는 것이 보이는데, 어떤 이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인도로 차를 몰고 다니기 일쑤이고, 열심히 걷고 있는 내 앞으로 떡하니 주차를 하고 내 길을 가로막는다. 어이없어서 쳐다보면 깔보듯이 날 보고 젠체한다. 왠지 모욕적인 일이다. 인도에 주차된 차를 비켜가기 위해 차도로 내려가면 내가 차들에 방해가 된다. 걷는 일은 생각보다 굉장히 불쾌한 일이다. 모종의 모멸감마저 느껴진다. 


요새 구두가 고생이 많다.


그래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 했다.

차를 가지고만 있고 아예 타지 않더라도 비용이 든다. 그러느니 얼른 팔아버리고 종종 필요할 때만 렌트카를 이용하는 것이 더 저렴하고 주차 걱정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정이 힘든 것은, 걷는 것에 많은 장점이 있지만, 비가 오거나 추운 날이면 차를 타고 싶어질 것 같아서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차를 팔아버리면 왠지 초라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을 것 같은데, 주변에서 다들 말리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아직 결정하지 못 했다. 어쨌든 확실해질 때까지는 일단 차를 두고 다녀볼 생각이다. 어쨌든, 적어도 살은 빠지니까. 


그동안 고생 많았어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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