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뉴스 시대, 우리에게 3000만큼 상상력이 필요해
나는 뭐든 잘 믿는 편이었다. 친구가 말하면 ‘응, 그렇구나.’ 앵커가 말해도 ‘아, 그렇구나.’ 그러다 보니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걸 믿었다고?”라고 큰 소리로 허허 웃더니 그냥 가버리는 친구(이 세상 쿨함이 아니다)도 있었고 “그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발을 빼는 정치인 앞에서 내가 그간 믿었던 정보는 대체 누구 입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허탈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믿었던’이라고 가정하는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는 내게 유독 불편했다. 당신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정보 중에 가짜가 있어. 제목부터 당신을, 나를 잘못 믿어버린 거라고 말하는 패기. 믿고 싶은 정보가 아니라 진짜 사실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다면 클릭조차 멈칫하게 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름다워지려면 더 많은 것에 불편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난 클릭해보기로 했다.
가짜가 가짜라는 걸 받아들이는 건 어렵다. 이는 가짜 뉴스가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와도 결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크를 구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는 말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해보세요.
프로그램의 굵은 줄기를 구성하고 있는 건 피해자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고 그것이 이전과 얼마나 달라진 삶인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가짜가 가짜라는 걸 받아들이는 일보다 힘들었다. 내가 그들을 사지로 몬 것 같다는 죄책감과, 스스로 경계하지 않았다는 후회가 계속해서 밀려왔다. 결국 가짜가 나쁜 이유는 피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읽고 듣는 우리는 더 불편해야 하고 더 의심해야 한다.
팩트(Fact)가 페이크(Fake)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다채로운 감정을 느꼈다. 답답함, 분노, 의아함, 허탈, 짜증 그리고 불안. 도대체 수많은 페이크를 어떻게 걸러 듣는단 말인가. 이에 대해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 김재영 PD로부터 직접 해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팩트에는 서사가 없고 페이크에는 이야기가 있다. 서사가 없는 사실에 사람들이 무심한 이유는 본능이다. 실제로 페이크의 뒤를 캐보니 그러했다. 18명을 인터뷰한 결과가 북한 전체 인구의 30%로 둔갑하거나 불고기의 어원 논란이 유래 논란으로 번지는 상황에 사람들은 ‘그랬다더라.’하는 이야기만 믿었다. 심지어는 어두워서 착각했을 수 있다며 얼버무리는 증언에도 가짜 뉴스의 공급자는 그 속에서 뽑아낼 수 있는 이야기에만 집중한 듯 보였다. 우선은 흥미를 끄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뒤 사실 여부를 캐묻는 질문에는 무책임함을 보였다. 이야기를 의심하라, 그것이 해법이다.
김재영 PD는 시사교양 PD 지망생에게 팩트를 잇는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피해 주지 않고 살아가려면 가짜 뉴스의 예비 소비자 – 우리 – 에게 필요한 역량 역시 상상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너무 빠르게 발전하는 가짜 뉴스 덕분에 내 상상력을 백분 발휘하지 않고는 도저히 팩트와 페이크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해지자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도 가짜일 거란 생각마저 들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뒤통수 가격을 당한 탓인지 이제 난 뭐든 잘 안 믿는 편이 되었다, 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여전히 난 순진하다. 하지만 여러 번 배신감을 느끼면 바뀌는 게 한 가지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취하는 태도가 변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준비, 땅!’을 외치고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랄까. 두렵지만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가져야 하고, 믿고 싶은 페이크가 아닌 진실을 믿어야 한다. 사람들이 모두 3000만큼의 상상력과 함께 가짜 뉴스에 스스로 대항할 힘이 생기길 바란다. 아니, 더 나아가 상상력이 필요 없을 만큼 깨끗한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