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 모두 모여라
김태호 PD의 새로운 예능 <놀면 뭐하니?>. 보면 볼수록 감탄이 절로. 그러나 일각에선 생각보다 너무 평범한 것 아니냐는 날 선 비판도 적지 않다. 아니, 왜?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놀면 뭐하니?>가 대단한 이유를 조목조목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볼 수 없던 인물, 볼 수 없던 이미지, 볼 수 없던 캐릭터를 볼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다. 최근 인기를 얻었던 <윤식당> <삼시세끼> <전지적 참견 시점> <나 혼자 산다> 등의 프로그램은 기획 하나로 이 모든 걸 가능케 한 프로그램들이다. 김태호 PD만의 차별성이 있다면 계속해서 출연진이 바뀌기 때문에 누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고, 누구나 나올 수 있는 열린 확장성에 있다. 오프닝 영상에도 강조되어있듯 프로그램 중심 콘셉트인 #릴레이 카메라는 일반인부터 공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지인들에게 전달되는 카메라 덕분에 TV 예능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모델이 등장하거나, 흔들리는 불안한 앵글로 영화배우가 잡히고, 그러는 중에 인물의 자연스러운 매력이 발산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정치인이나 특정 직업인이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은 기획이다. 이들도 나오려나?
제작진이 ‘촬영’에서 빠지면서(혹은 힘을 덜어내면서) 제작 시스템에 변화를 가져온 점에 나는 주목한다. 어찌 됐든 시스템을 바꾼다는 건 엄청난 거니까. 1) 콘텐츠 퀄리티 2) 노동자 3) 제작비 측면에서 신선한 변화였다. 촬영 인원이 엄청났던 <무한도전>과 대비되게 촬영 인원이 없다는 멘트를 유희열이 한 바 있다. 등장인물의 자연스러운 캐릭터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은 환경을 조성한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작진이 방송에 공을 들이는 부분에도 차이가 생긴다. 단순화해 보면, 이전에는 촬영과 편집에 들던 노력이 이제는 편집이나 스토리텔링에 더 집중적으로 투자된다. (인력 감축에 따른 일자리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이전 글(https://brunch.co.kr/@judgine/19 <시즌제가 절실한 MBC 예능들>)에서 밝혔듯 제작진에게 어느 정도 숨 돌릴 틈이 주어졌다는 건 긍정적 효과 아닐까. 마지막으로 세트장 대신 <조의 아파트>라는 프로그램으로, 세트 디자인이나 세트 제작에 들일 제작비도 많이 줄었을 터다.
<놀면 뭐하니?>에서 추천하고 싶은, 가장 재미있는 시리즈가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것 같다. <유플래쉬>라고.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 <프로듀스 101> <쇼 미 더 머니> <비긴 어게인> <히든 싱어> <K 팝스타> <더 팬>까지 한동안 음악 예능은 그야말로 대(大) 유행이었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고 한편으로 신선한 음악 예능은 이제 없을 거라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새로운 음악인 발굴을 ‘오디션’이 아닌 색다른 포맷으로 가능케 한 기획. <유플래쉬>는 숨어있는, 아직 주목받지 못한 훌륭한 음악인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본인만의 색깔을 충분히 낼 수 있는 장이 되고 있다. 심지어 오픈 비트로 유튜브를 통해 일반인도 참여하고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 음악이라는 분야에 목소리 외에도 참 많은 악기가 존재하는데 이들을 하나씩 조명해 들려주면서도 연주자의 색깔이 드러나도록 여러 번 반복해 유재석의 드럼 비트를 귀에 익을 때까지 틀어주는 센스. 오디션 외에, 덜 자극적이면서 진짜배기 음악인을 발굴할 수 있는 꾸미지 않은 리얼리티 음악 예능. 이는 1화에서 유재석이 밝힌 “예능에서의 새로운 세대교체” 이야기와도 결을 같이한다. 잘하는 예능인이 얼굴을 비출 수 있게 해 준 <릴레이 카메라>라는 포맷. 극찬한다.
<프로듀스 X 101>이 순위 조작 조사를 받게 되면서 <프로듀스 101> 이전 시즌뿐만 아니라 <슈퍼스타 K> <쇼 미 더 머니>까지 조작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고구마 뽑듯이 줄줄이 증거가 나오고 있는 가운데 팬들(나 포함)의 의심은 더해가고, 그렇게라도 이름을 알려야만 했던 음악인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연출이라는 직무를 가진 제작진이 ‘연출’ 하지 않은 리얼리티 오디션 및 성장 스토리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제작진의 개입 여부에 대한 의혹을 기획만으로 어떻게 해소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나 또한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카메라가 그들 손에서 그들 손으로 넘겨지는 <릴레이 카메라> 형식으로 진행된다면? 자연히 의혹 해소에 음악인 발굴까지 덤으로 얻는 것 아닌가. 역시 김태호다.
수많은 음악 예능 중 <K 팝스타>를 마지막 시즌까지 꾸준히 챙겨 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박진영, 보아(혹은 유희열), 그리고 이제는 이름을 쉬이 부를 수 없는 그....... 세 명의 MC가 전문가의 관점에서 전문지식을 쉽게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음악 문외한인 나는 그들처럼 ‘느낄’ 수 없기에 주관적이더라도 그들의 평가가 필요했다.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추상적인 설명이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그런데 <유플래쉬>는 쉽다. 음악을 구구절절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러지도 않는다. 대신 조목조목 들려주고 시청자가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도우미 역할을 충실히 해준다. 음악을 수 천 곡 들어도 잘 구분 못하던 베이스 소리가 ‘들렸’고 윤상이 왜 윤상인지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PD는 시청자가 초등학생이어도 이해 가능할 정도 수준으로 쉽게 스토리텔링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거의 교과서 같은 프로그램이 나왔다 하겠다.
나영석 PD는 CJ ENM으로 소속을 옮기면서부터 행보가 족족 대중들의 이목을 끌었다. 과감한 시도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기획에 평범함을 덧바른 연출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한 가지 늘 아쉬웠던 점은, 그래서?(So, What?)였다. <신서유기>가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삼시세끼>가 한 끼 차려 먹기도 힘든 이들에게는 어떤 위로가 될 수 있는지, <꽃보다 할배>가 취업 준비만 몇 년째인 내 삶에 무슨 힐링을 선사하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언제나 내 삶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왔던 이유다.
나에게 김태호 PD만의 개성이 뭐냐 묻는다면 내 삶과 꼭 맞붙어 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할 것이다. 나처럼 친구들끼리 모여 실없는 농담 하며 시간 보내는 사람들, 모두에게 인정받지는 못해도 누군가에게는 인정받으며 사는 사람들, 하루하루 힘겹고 고되지만 동시에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꼭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화끈하게 화제성을 끌고 있진 않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유난스럽지 않고 뭉근하게, 김태호 PD만의 콘텐츠가 자리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