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개연성 Jun 01. 2024

성인 ADHD의 장점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고 몰입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모르는 것 투성이 하지만 안심할 수 있어”, “중요한 것은 마카로니 보글보글 끓는 수프”.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추운 겨울에 따뜻한 마카로니 수프를 함께 먹을 수 있다면 안심할 수 있다는 소녀다운 가사다. 하지만 어떻게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안심할 수 있을까?


나는 무언가를 확실하게 알아야 안심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불확실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모르는 척하면서 여유 부리지도 못한다. ‘그는 사실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처럼, 설사 알아봤자 상처받을 것이 뻔한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알고 싶다. 그리고 만약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에마> 속 주인공처럼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내가 확실하게 알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거예요. 아! 모든 일은 공개적이고 확정적으로 하는 것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당신이 안다면!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나중에 ADHD인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모호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ADHD의 흑백 논리, 극단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확실한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2023년 12월, ADHD 치료를 본격적으로 한지 1년이 됐다. 그래서 1년 후기 글을 쓰고 싶었는데 결국 쓰지 못했다. 치료 6개월 후기랑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서였다. 오히려 그때와 비교하면 더 안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한 발 전진하면 두 발 후퇴하고, 뭐 그런 식이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원상 복귀된 생활 습관이나 행동 패턴들을 생각하면 자괴감이 든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눈물날만큼 서럽고 억울하다. 나 진짜 열심히 했는데.


그런데 나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도 안다. 사실 나는 여러 방면에서 많이 좋아졌다. 가장 큰 변화는 12월에 진행한 캐주얼 다이닝 모임에서, 호스트로서 사람들과 나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ADHD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내가 더 이상 그걸 약점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건 그냥 내가 여성이고, 동양인이고, 29살인 것처럼, 나의 일부일 뿐이었다.


작년 하반기에는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그리고 좋지 않은 사람들과 관계를 끝냈다. 내게 건강한 관계를 분별하는 힘을 키우고, 단호해지는 법도 알았다. 슬퍼서도 울었지만 행복해서도 울었다.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 낯선 컨퍼런스에서 작은 용기로 몇 년 전에 쓴 글을 공개하고, 몇십 명의 사람들이 응원해 줬다. 좋은 동료와 이웃과 친구가 생겼다. 누생누영 커뮤니티에서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도시에서,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많은 동료를 만났다.


2015년에 내가 사랑에 관해 썼던 글을 우연히 봤다.


나는 드라마 같은 사랑 이야기가 싫다.
어느 순간부터 보고 싶지가 않다. 유치하고 진부해서가 아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렇다. 아름다운 것은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하니까. 마음이 아픈 것이 싫다.
차라리 코미디처럼 가볍고 유쾌하고 별 것 없고 아름답지도 않으며 때론 찌질하고 자주 궁상맞고 현실에 너절너절한 사랑이 낫다. 아무 의미 없는 사랑. 아프지 않은 사랑. 하지만 그런 것마저 허울뿐 아닌 진짜 '사랑'이 되는 순간 아름다워지겠지. 멍청함도 순수함으로, 일상도 빛나는 순간으로, 너무 쉽게 아니 잠시만 방심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치환해 버리는 사랑은 천국이고 동시에 너무나 잔인하다.


20대의 나는 사랑을 무서워했다. 슬픔이 나를 덮치는 게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사랑에 한 번 빠지면 정말 깊이 빠지는 성향이 있어서, 사랑이 나를 너무 높은 곳으로 데려갔다가,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을 알았다. 그러면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지옥에 떨어지고 몇 년을 아파하겠지.


그렇지만 두려워하는 것과 별개로 사랑에 취약해서, 나는 하루에 몇 번씩 무언가에 꽂히고, 매번 사랑에 빠지고,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최근 <ADHD 2.0>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성향이 ADHD 때문임이 분명해졌다. (책에서는 벼락에 맞는 것에 비유한다. ADHD가 있으면 하루에 몇 번씩 벼락에 맞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책에서는 그걸 재능이라고 말한다. 생산적으로 쓸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창의적인 크리에이터, 사업가가 될 수 있다고.


약 8년 만에 사랑에 관해 내가 쓴 글을 다시 읽고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은 천국도 지옥도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그게 싫은 건 아니다. 오히려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살면서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건 희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금사빠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의리가 없는 건 아니다. 실제로 나는 한 사람을 사귀게 되면 아주 오랫동안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내가 사랑에 빠지는 대상이 사람이 아닌 사건, 사물, 서비스가 된다면 나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큰 이점을 가진 셈이 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생생한 글을 쓸 수 있으니까.


“멍청함도 순수함으로, 일상도 빛나는 순간으로, 너무 쉽게 아니 잠시만 방심해도 눈 깜짝할 사이에 치환해 버리는 사랑” 이것은 누가 뭐래도 내가 가진 힘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천국이어도 지옥이어도 이 둘을 오가도 괜찮다. 모르는 것 투성이어도 괜찮다. 왜냐하면 나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면서 느리게 아주 느리게 나아갈 거니까.


나는 옛날부터 행복 부채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고 믿었는데, 행복이 채워지면 그만큼 고통이 뒤따라온다는 법칙이다. 그래서 행복한 순간이 무서웠다. 곧 다가올 고통의 징조였으므로. 이제는 예전만큼 무섭진 않다. 행복 부채의 법칙을 믿지 않을뿐더러, 고통이 와도 안전하다는 것을 안다. 스스로를 믿을 수 있다면 나는 항상 안전할 것이다.


나 자신에게 주는 마카로니 수프.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게 해주는, 나의 집을 기억하게 해주는 따뜻한 위로. 불확실하고 모호한 순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 추운 겨울마저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온기. 앞으로 있을 더 많은 아름다운 순간을 기다리며 휴식하고, 사랑에 감싸이며, 빛을 받는다.


출처 pinterest




최근 친구나 지인들이 ADHD 진단을 받고 질문을 많이 하는데

ADHD의 단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걱정되어

올해 1월에 쓴 글을 공유해 봅니다.


제가 솔직한 글을 쓸 수 있도록 많은 지지를 해준

낯선 컨퍼런스 6기 커뮤니티, 누생누영 커뮤니티,

심변잡기 모임장 피노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이 글에 나온 노래는 일본 가수 Perfume의 <Macaroni>입니다.

이 글에 나온 책은 에드워드 할로웰, 존 레이티의 <ADHD 2.0>입니다.


오늘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좌절과 희망을 발견하는 모든 성인 ADHD 분들에게 진심 어린 응원과 위로의 마음을 보냅니다. 우리 모호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스스로를 믿으면서 잘 버텨보아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만은 내 편이 되어 준다면, 언젠가 지지해 주는 사람들을 분명 만날 수 있습니다. 버티는 것이 너무 힘들면 따뜻한 수프를 먹고요.


그러고 보니 작년 12월에 합정 믹스처의 정제석 셰프가 한 오니언 수프에 영감을 받아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최근 성북에 새롭게 프렌치 비스트로를 연 정제석 셰프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모르는 것 투성이 하지만 안심할 수 있어
중요한 것은 마카로니 보글보글 끓는 스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