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은 함박눈이 유독 많이 왔고, 나는 목도리를 선물 받거나 새로 장만했다.
대학교 친구들과의 신년 모임. 에디터를 하다가 그만두고 약대에 입학해 학생 신분인 희조는 모임에 나온 친구들에게 선물로 목도리를 나눠 주었다. 작년부터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기자 우진에게는 베이지 패딩 머플러를. 인생과 사랑에 고민이 많은 나실에게는 레드 털실 머플러를. 신년 계획을 세우는 데에 여념이 없는 나에게는 네이비 털실 머플러를.
어떤 기준으로 준 목도리 선물이었을까? 각자에게 꼭 맞는 색깔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퍼스널 컬러 기준일 거라 짐작해 본다. 각자의 스타일을 고려해서 어울리는 목도리를 선물해 준 마음이 섬세해서 고마웠다.
집에 온 뒤 문득 궁금해 검색했다가 목도리 선물이 '이별'의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마도 그런 의미는 아니었겠지만, 희조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갑자기 훌쩍 사라져 버리는 상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때마침 올라온, 일기 쓰기 모임을 같이 하는 미소님의 일기에 "오는 길에 친구 생일선물로 머플러를 샀다"라는 문장이 있길래 왜 하필 목도리를 선물했는지 물었다. "겨울에 맞는 선물이라고 생각했고 그분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머플러는 디자인이 다양하면 스타일링하기에도 기분이 좋고, 크게 부담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따뜻함을 선물하는 느낌이랄까!"
따스하다는 사전적으로 '정, 태도, 분위기 따위가 정답고 포근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나는 예전부터 '포근하다'라는 말이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뉘앙스를 가진 말이 영어로는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cozy'나 'warm'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부족하다. '포근한 눈'은 자연스럽지만 'cozy snow'나 'warm snow'는 왠지 어색하니까.
한편 포근함을 떠올리면 항상 함박눈이 떠오르는데ㅡ손이 시릴 만큼 차갑지만 만져보면 부드럽고, 땅이나 물건에 닿으면 그 모양 그대로 감싸 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포근함은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감각적인 부드러움이다. 영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한국적인 정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올 겨울 구매한 목도리는 머플러그랜마의 모던한 하늘색 케이블 머플러다. 길이가 아주 길고, 목 주위에 두르면 엄청나게 따뜻하다. 문득 브랜드 이름이 왜 머플러그랜마인지 궁금해져 브랜드를 운영하는 소담 언니에게 물어보니 "은퇴 시기쯤 할머니가 되면 뭘 하고 싶은지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예쁜 목도리를 파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목도리 선물에는 '이별' 말고 '당신을 제 마음속에 두고 있어요'라는 의미도 있다. '이별'과 '당신을 제 마음속에 두고 있어요'는 겉으로 보기엔 정 반대 같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누구나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고, 헤어진 뒤에는 마음에 남으니까.
중요한 건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만나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머플러처럼 포근한 마음.
영어로 'wear one's heart around one's sleeve'는 '속내를 솔직하게 말하다'라는 의미다. 예전에는 어떤 감정을 느끼든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친구든 연인이든 이별 후에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는 내가 쿨하지 못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나의 이런 성격 덕분에 주위에 목도리처럼 포근한 인간관계가 많은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작년 겨울에 샀던 머플러그랜마의 목도리. 예쁘고 아주 따뜻하다. 올해 겨울에도 잘 사용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