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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uman diary Nov 17. 2015

상상력의 힘

성욕, 열린결말 그리고 건축의 상상력

사람에게는 욕구가 셋 있다. 식욕, 소유욕, 성욕 ...

맛 있는 음식을 보거나 냄새를 맡으면 좋은 음식이 놓여진 식탁 위에서 음식을 내려다 보는 나를 상상한다.

가지고 싶은 물건을 보면 그것을 소유함으로서 만끽하는 만족감을 상상한다.

그리고, 성욕은 나머지 두가지와 조금 다른데 일탈스러움에 대한 탐욕을 함께 수반한다.

야한 동영상 또는 사진을 보거나, 길을 걷다 아름답고 탐스런 남성 또는 여성의 체취를 느끼거나, 

사랑해선 안되는 사이임에도 그 사랑을 갈구하는 등 성욕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탐욕스러움과 함께 한다. 단지,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족할 뿐 그 이상은 안된다며 절제의 정신을 발휘할 뿐 누구나 성욕에 있어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성욕이 없는 경우도 있다. '난 성욕이 없어서 그런 감정을 잘 못 느껴요. 워낙 이성적인 편이라...' 그럴수도 있지만 난 그건 위선 혹은 포장이라고 본다. 나 역시 절제의 컨트롤만 없다면 얼마든지 성도착증 환자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깐 ...


무엇인가 갈구할 때 인간은 갈구하는 대상에 대해 이미지네이션 즉, 상상의 과정을 거친다. 음악, 미술 과 같은 예술분야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상상력에 기반한 장르다. 아무리 비평가들이 좋은 작품이네, 쓸데없는 작업이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바라보고 듣고 즐기는 이들의 상상력보다 더 확실한 평가는 없을 테니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조용한 곳에서 케니지(Kenny G, 뉴에이지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면 마치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나 홀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뉴에이지 정신이 본래 그러한 것이겠지만 음악은 나를 편안한 나로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흥분의 도가니로 이끌기도 한다. 울트라뮤직(Ultra Music, 일명 나이트클럽 뮤직)을 많은 이들과 함께 들으면 마치 약이라도 한 듯 음악에 홀려 온 몸을 흔들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미술에서도 마찬가지다. 난 미술공부는 꽤나 한 편이지만 막상 미술 작품 앞에 서면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한참 설명을 들은 후에야 '이게 그런 뜻이었어? 난 잘 모르겠네... ' 그러는 편이니 공부는 왜 했나 싶다. 반대로 딱히 설명을 듣지 않아도 느껴지는 미술작품도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키스(Kiss)'는 내게 묘한 야릇함과 왠지 모를 불륜스런 자극을 함께 주었다. 책이나 글로서 미술을 이해한게 아니라 미술작품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쾌감을 느낀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것들 중에서 상상력은 가장 훌륭한 선물이라고 본다. 상상력이 있기에 절제의 불만족감을 대체하고 상상력이 있기에 예술을 탄생시켰다고 보니깐.


건축에 있어 상상력은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았다.

어떤 이들이 '이 건축물이야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건축물입니다. 건축은 예술인가? 공학인가? 미래 건축을 제가 새롭게 정의했습니다.'며 매번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내가 보는 좋은 건축은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쁜 남자 혹은 여인과의 하룻밤 혹은 예술작품을 대할때 나의 생각이 내 옆에 있는 이와 같을 수 없다. 대상을 대하는 이의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구현된다. 일종의 '열린 결말'이 상상력의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공간은 그 공간을 대하는 이들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력을 부여한다. 물론, 이러한 상상력을 위해 일부러 장치를 삽입하거나 계획적인 공간을 설계하기도 하지만 ...

첫번째 공간은 경동교회다. 한국 3세대 건축가 '김수근'씨의 작품이다. 경동교회의 예배당으로 들어서면 일단 어둡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주변의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는데 회색의 콘크리트가 나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부처님 손바닥 같기도 하고, 엄마의 손 혹은 자궁 같기도 하고 하여간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진다. 신에 대한 의심이 많은 자라도 왠지 모를 신에 대한 경외감이 생길것만 같다. 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건 왠지 난 우연의 일치인 듯 싶다.

건축가 김수근의 '경동교회' 예배당

두번째 공간은 베를린에 있는 유태인 박물관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체주의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작품이다. 리베스킨트의 건축엔 사선이 참 많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들이 갇혀있던 가스실을 표현한 공간이다. 어둡고 뭔지 모를 것들이 발에 밟히는 좁은 공간에 서 있다. 천정에 얇은 창 하나에 빛이 스며 들어온다. 일종의 희망고문을 표현한 것이다. 내가 여기서 느낀 것은 불편함이었다. 감옥 같은 공간에 비해선 천정도 높고 좋은데 시간이 지나면 바닥에 뭔가 많아(아마도 해골을 상징하는 거겠지만) 눕기도 불편하고 천정에서 쏟아지는 빛 때문에 계속 위를 쳐다보면 목도 아플 것 같다. 더 큰 불편함은 이야기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난 외로운 불편함을 상상하게 된다. 철저히 의도된 계산 속에 만들어진 공간이다.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

세번째 공간은 문훈의 주택이다. 문훈은 이 주택에 대해 설명하면서 건축주가 꿈꾸는 '날으는 집'을 현실 속에 옮겨 놓고 싶었다고 말한다. 조금 괴이하게 보일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상상력으로 그려진 그림이 현실 속에 그대로 실현되었다. 실제 본 적이 없어 어떻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 경우엔 상상력을 현실로 옮겨 '열린 결말'을 기대하긴 어려운 경우다.

건축가 문훈의 양평 대심리 주택

상상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 끝까지 오르는 초능력의 매력이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노력에 달렸다. 물론, 사회가 정해 놓은 선을 넘어 실행에 옮긴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비난과 처벌을 피해 실행할 수만 있다면 그 역시 꽤나 짜릿한 경험이 될 것이다.

오늘날 '좋은 건축'에 대한 정의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의 의견이 존중되고 이성적 판단이 넘치다 보니 '좋은 건축'을 평가하는 기준조차 부재하다. 좋은 건축을 보는 것은 첫째는 경험이며, 둘째는 열린 결말에 대한 노력, 셋째는 경계없는 상상력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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