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별 Jun 16. 2024

최근에 산 어떤 것

옷걸이

월요일에는 옷걸이를 서른 개 샀다. 걸었을 때 옷이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고 어깨뿔도 방지해 준다는 베이지색감의 옷걸이를. 사실 나에게 이미 옷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옷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계속 옷을 더 사고 싶다. 같은 쉐입이어도 색상이 다르면 사고, 디자인이 비슷해도 재질이 다르면 산다. 물론 아무거나 사는 게 아니라 내 기준에서 예쁘고 입기에 편한 옷이면 된다. 그렇지만 십몇 년 간은 과감한 옷들은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다. 어깨선이 드러난다거나 가슴이 깊이 파였다거나 길이가 무릎 위로 올라온다거나 두꺼운 팔뚝 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민소매 같은 옷들은 예쁘지만 일단 거르고 본다. 원래 보수적(?)인 스타일을 선호했던 건 아니었다. 몸매에 자신이 있었을 때는 짧은 핫팬츠를 입고 맨다리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고, 한겨울에도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었다.

살이 많이 찌자 옷을 사는 게 가장 불편해졌다. 지금이야 플러스 사이즈의 옷들이 많이 판매되고 있지만 십 년 전만 해도 플러스 사이즈의 옷은 예쁘기는커녕 구하기도 어려웠다. 디자인은 둘째 치고라도 우선 맞는 옷부터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매장에 가서 직접 옷을 입어 보는 것도 창피해졌다. 대부분의 기성복들이 내게는 너무 작거나 아예 입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인터넷으로 옷을 사게 되었다. 몇 년째 한 온라인몰에서 옷을 구매하고 있다. 가격대비 옷감도 비교적 괜찮고, 일단 활동하기에 불편함이 없는 옷들, 그리고 단정하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내는 옷들이 많은 온라인몰이다. 매일 새 옷들이 업로드되기 때문에 어떤 옷이 새로 입고되었나 기다리는 맛도 있다. 서른 개의 옷걸이를 주문하기 하루 전에도 그 사이트에서 옷을 샀다.


그런데 옷을 사고 보니 이미 포화상태인 조립식 행거에 걸 자리가 더 이상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어떻게 틈을 비집고 걸어보려면 일단 옷걸이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옷걸이를 샀는데, 왠지 죄책감이 들었다.


길티 플레져라고 하나. 야식을 시켜 먹고 난 후에나 당장 필요하지는 않지만 (심지어 비슷한 제품이 이미 있는데도) 굳이 사치품을 더 샀을 때 묘한 쾌감과 함께 약간의 죄책감이 드는 이상야릇한 기분을 일컬어.


옷걸이 서른 개를 사면서 도대체 옷을 언제까지 살 건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있는 옷들도 다 입지 못하고 한 철을 보내면서, 얼마나 더 많은 옷이 필요한 건데?라는 생각이.


내가 왜 이렇게까지 옷에 집착하나, 생각해 보니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대학생 때 친했던 친구가 내가 미니홈피에 올린 사진을 보고 난 후, "넌 왜 항상 같은 옷만 입어?"라고 말했을 때도, 처음 사귄 애인이 "이런 할머니 같은 옷 좀 입지 마."라고 했을 때도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이후부터 나는 조금씩 달라진 것도 같다.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씩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봐줄 만하고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 보일까, 신경 쓰게 되었다.


이제 나는 어제 입었던 옷은 오늘 입지 않는다. 오늘 입었던 옷은 내일 또 입지 않는다. 그날 입는 옷의 색감과 분위기에 맞춰 향수도 매일 바꿔 뿌리고, 메이크업도 달라진다. 화장대에는 스무 병이 넘는 향수와, 마흔 개가 넘는 립스틱이.......


벌이가 넉넉한 편도 아니면서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예쁜 걸 좋아하는 사람인 것이다. 아름답고 예쁘고 향기롭고 멋진 걸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이러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이게 내 정체성의 일부분인 것 같다. 그래서 쪼들리면서도 예쁜 것들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 같다. 나도 이런 내가 어리석다는 걸 안다. 미련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다.

작가의 이전글 잠 못 드는 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