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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Jan 09. 2024

나의 몽골 도서관

평택 반도체 노가다 숙식기 20번째 이야기

최근 고덕의 멤버들과 통화 했습니다. 

뭔가 경기가 살아나는가 싶더니 몇몇 업체는 다시 슬로다운으로 있던 연장마저 없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올해 상반기도 조금은 힘들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제가 있던 팀도 몇몇 분들은 그만두거나 팀이 나눠졌다고 합니다. 제가 일할 때 까지만 해도 이대로 몇년간 유지될 것 같은 팀이었는데 또 이렇게 쉽게 바뀌고 하는걸 보며 역시 현장은 변화무쌍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제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저기 몽골에 가서 기다려 주세요”

이 말을 듣고 진짜 몽골인가? 하는 표정을 있자 담당자분은 어이없게 웃으면서 흰색 텐트를 가리켰습니다.


처음 고덕 현장에 오면 계약서를 쓰고 다음 날 신체검사와 내일부터 사용할 보호장구들을 지급받습니다. 사람들이 많으면 하루 종일 대기합니다. 보통 건물이 아닌 임시로 제작한 천막에서 대기합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있는 곳이 ‘몽골텐트’라는 걸 알았습니다. 

앞서 3편‘언어의 장벽을 느끼다’에서 말한 것처럼 한동안 용어들을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몽골텐트도 행사 관련자 분들에게는 친숙하겠지만 저 같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단어입니다. 


몽골텐트는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휴게실로 사용하고 외부업체들은 자재 창고나 임시 사무실로도 이용합니다. 높은 곳에서 보면 수많은 뾰족 지붕들이 펼쳐져 있는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일하면서 가장 많이 몽골텐트를 만나는 상황은 휴게시간입니다. 대부분 업체에서는 하루 30분 정도 휴식시간을 제공합니다. 이때 아무 데서나 쉬면 안 되고 반드시 각 층마다 휴게실에 들어가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물론 레벨이 오른 반장님들은 자기만의(?) 쉴 곳을 만듭니다.)


참 누가 디자인했는지 궁금합니다. 완벽에 가까운 산업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들어가 보면 ‘정말 이게 휴게실이라고?’ 싶은 장소가 나옵니다. 들어가면 편의점에서 볼 수 있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가 수십 개 놓여 있습니다. 보통은 의자를 옮기지 말라고 아예 못을 박아 놓기도 합니다. 삼성 반도체 공장이라는 이름 치고는 시설이 조금 아쉽습니다. 내부에 정수기, 에어컨, 혈압계 등 갖출 건 다 있습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거의 무제한적으로 에어컨이나 히터를 틀어줍니다. 임시 휴게소인 만큼 완벽을 바랄 순 없지만 그래도 익숙해지면 이곳조차 천국으로 느껴집니다. 


보통 몽골텐트(이하 몽골)에서 사람들은 잠을 자거나 스마트폰을 합니다. 중계기가 설치되지 않아 잘 터지지 않기에 데이터가 없어도 되는 게임이나 어떻게든 미약한 신호가 통하는 곳으로 이동해 카톡이나 인터넷을 합니다. 


천국을 대하는 자세

다소 불편하지만 잠을 잘 수도 있습니다. 의자를 못 옮기기에 그저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는 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하루 종일 2만 보씩 걸어 다니니 앉아서 눈만 감아도 신기하게 깊이 잠들 수 있습니다. 한번은 벽 쪽에 붙어 있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모님이 저를 툭툭 치며 깨웠습니다. 

’내가 무슨 실수했나‘ 싶어 일어나자 이모님은 벽 위에 있는 얇은 배관 파이프에 머리를 데보라는 듯이 시범을 보입니다. 

’아‘

머리를 파이프에 기대자 새로운 천국이 찾아왔습니다. 게다가 이모님은 멈추지 않고 자신처럼 두 다리를 X자로 꼬아서 쭉 펴보라 합니다. 무거운 작업화를 신은 두 다리를 이모님 말대로 꼬아봅니다. 그리고 슬쩍 뻗어 앞으로 내딛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파이프에 기대고 눈을 감자 그야말로 시몬스, 에이스 침대 부럽지 않은 편안함이 몰려왔습니다. 


마치 하와이에서 야자나무 사이에 걸어 둔 해먹에 누운 것 같은 편안함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파도 소리와 알로하 노랫소리 대신 어디선가 분진 제거기가 작동하는 소리와 신호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그래도 천국 같았습니다.


무시무시한 한여름의 몽골

현장에서 가장 힘든 때를 골라보면 당연히 여름과 겨울입니다. 건물의 완성도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철골 구조물을 막 세웠고, 합판 벽을 겨우 세운 정도입니다. 이 땐 부 온도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펼쳐집니다. 여름에는 높은 온도와 환기가 안돼 습도가 어마어마하게 높습니다. 약간 과장 보태서 수증기 속을 헤엄치는 듯합니다. 한겨울은 반대로 온몸을 히트텍부터 시작해서 3겹, 4겹을 입어도 춥습니다. 저희 팀장님은 아예 발가락에 경동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한여름의 몽골에 또 다른 복병이 있습니다. 바로 ’냄새‘입니다. 이미 다들 수증기 속을 헤엄쳐 다니며 땀과 습기가 온몸에, 특히 양말에 베입니다. 그런 상태로 휴게실로 들어오면 일단 누군가의 땀내로 숨이 막힙니다. 아무리 에어컨이 풀가동 중이라 해도 냄새만큼은 상당히 강렬합니다. 게다가 발을 말리기 위해 신발을 벗으면 남자 여자 할 거 없이 강렬한 발 냄새가 납니다. 


특히 작은 휴게실이 아닌 100명 이상을 수용하는 큰 휴게실로 가면 그야말로 온갖 군상의 냄새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에어컨 4대가 초강력 냉방을 하고 있어도 100명 사람들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과연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계가 인간을 열에너지원으로 삼는 이유를 실감합니다. 


사무실, 자재 창고 몽골


“너 몽골 가서 자재 좀 가져와라”


삼성 현장이 워낙 넓다 보니 각 업체들은 공사하는 건물 바깥쪽에 자체적인 임시 창고 내지 사무실을 운영합니다. 본사는 아예 현장 외부에 있고 임시 사무소를 통해 기본적인 자재나 서류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몽골의 주인은 보통 ‘창고장’이라 부릅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재나 서류들을 관리합니다. 이분들하고는 특히 친해두면 굉장히 좋습니다. 이분들이 보통 절연테이프나 장갑, 방진 마스크 등 개인 소모품도 배급합니다. 1인당 배급량이 정해져 있어 필요 이상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분들과 친해지면 남는 것들을 따로 받을 수도 있고 각종 서류들도 친히 찾아주시는 등 부가적인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친해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기본적으로 몽골에 입국(?) 할 때 밝게 인사하고 출국 때도 밝게 인사하면 됩니다. 거기에 가끔 카누나 맥심 커피믹스를 드리면 그때부터는 편하게 몽골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회사의 각종 휴일이나 연장, 야간 근무 정보도 먼저 접수할 수 있습니다. 


저희 팀 형님 한 분이 창고장이 자기에게 불친절하다며 한번은 크게 싸우고 왔습니다. 당연히 필요한 서류도 얻지 못했습니다. 순간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그동안 커피믹스를 투자하며 구축해 놓은 네트워크가 끊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보안 구역 출입에 들어가는 서류도 창고장이 찾아주는 경우가 많아 편했지만 이제 제가 일일이 찾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이야기해서 사태는 해결되었지만 역시나 현장에서 누구와도 적이 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여담으로, 가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누구와도 크게 싸우지 않고 물 흐르듯이 지내는 사람들을 봅니다. 예전에는 주관이 뚜렷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할 말 다 하고 똑 부러지는 사람을 엣지있고 개성있어서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있다 보면 오히려 두루두루 크게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이 새삼 대단해 보입니다. 누구와도 적을 두면 나중에 어떤 부분에서 꼭 막히는 걸 현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나의 도서관

현장에 온 지 1~2달 후부터는 몽골이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허술해 보여도 이곳에서 보호장구를 벗을 수 있고 어딘가 머리를 기대고 다리를 쭉 펴면 그때부터 천국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그저 스마트폰을 하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전파도 잘 안 터질뿐더러 뭔가 인생을 낭비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점심시간 같을 때에는 밥 먹고 오면 대략 4~50분 정도 시간이 남습니다. 그때 예전에는 자는 편을 택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합니다. 시끄러운 현장에서 왜 책을 읽어야겠다 생각했을까요? 점심시간 때 1~20분 정도 안대를 쓰고 귀마개를 한 뒤에 눈을 감고 깊게 수면을 취합니다. (혹시나 그린 3동 6층 중앙 휴게실에서 귀마개와 안대를 하고 잤던 사람을 보았다면 아마 저일 것입니다^^;)


애플워치에 알람을 걸어놓고 깊은 수면 후에 개운한 기분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2~30분 정도 독서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두꺼운 책을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과 가벼운 스마트폰에 대한 유혹이 컸습니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펴고 읽기 시작하자 무섭게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끄러운 현장에서 정신적인 고요함을 찾으려는 갈증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무섭게 집중할수록 시간은 빨리 흐릅니다. 어느 순간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주변의 사람들은 깨어나 기지개를 시작합니다. 


독서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퇴근 이후에도 몽골텐트에 남아 독서를 했습니다. 건물 외부에 있는 몽골텐트는 야간이나 철야 근무를 하는 인부들을 위해 24시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연장 근무를 끝내고 저녁 7시가 되면 사람들은 출구로 걸어갑니다. 이때 팀원들에게 잠깐 쉬었다 간다고 말하고 휴게실로 들어가 적당한 자리를 찾습니다. 몽골의 입구에 들어선 순간 이전에 있던 사람들의 강렬한 체취가 덮쳐옵니다. 한번 크게 호흡을 하며 들어갑니다. 어느 순간 이 냄새마저 익숙해졌습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안전모를 파란 편의점 의자 아래에 놓습니다. 한쪽 다리를 꼬고서 책을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읽기 시작합니다. 


한 겨울에는 히터를 풀가동해도 춥습니다. 따뜻한 자리는 이미 레벨 높은 반장님들이 차지했기에 구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는 텀블러가 정말 유용합니다. 추워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써모스 텀블러 뚜껑을 컵으로 삼아 뜨거운 물을 붓습니다. 형광 조끼 주머니에 준비한 맥심 프리미엄 믹스를 꺼냅니다. 뜨거운 물 위에 조금씩 부으며 믹스 봉지를 막대로 만들어 젓습니다. 물을 먼저 받지 않고 믹스를 부으면 나중에 컵 아래에 설탕이 들러붙기 때문에 반드시 물을 먼저 받고 그 위에 가루를 뿌려줘야 합니다. 


이렇게 한 손에는 책을, 나머지 손에는 커피를 들고 책을 읽습니다. 여기에 다리까지 꼰 채로 책을 읽으면 그야말로 완벽합니다. 이렇게 30분 정도 책을 읽고 나서야 게이트를 나갑니다. 게이트로 가는 길은 텅 비어 있습니다. 분명 아까만 해도 퇴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은 황량하게 바람만 붑니다. 이 풍경이 왠지 좋았습니다. 홀로 터덜터덜 걸으면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뱉습니다. 추운 날에는 우윳빛 같은 입김이 퍼집니다. 새까만 밤 하늘, 안경에 비친 주변 조명들의 산란, 고요함, 만족감이 마음속 가득 차오릅니다. 가끔은 업체와의 미팅으로 늦게 퇴근하는 팀장님을 뵙니다. 왜 이리 늦게 나가냐고 놀라면서 묻습니다. 그냥 힘들어서 휴게실에서 쉬다 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저에게 ‘차라리 근처 카페에 가지 그러냐’ ‘그렇게 지저분한 곳에서 집중이 되느냐’라고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신기하게 제 삶을 통틀어서 그렇게까지 집중하며 책을 읽은 적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시끄럽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몽골의 휴게실은 저에게 이상하리만큼 높은 집중과 마음속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전파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스마트폰도 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일까요?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내 한 손에 들고 지저분하게 밑줄을 그어대며 책을 읽었습니다. 소설책, 시집, 잡지, 자기 계발서, 실용서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어댔습니다. 계산해 보니 대략 1주일에 한 권씩 읽었습니다. 보통 점심시간에 30분, 퇴근 후 3,40분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순수하게 집중하니 ‘내가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무서운 속도로 책을 읽어 나갔습니다. 

책상도 없고 따로 마련된 공간도 없기에 책에다 바로 줄치고 필기하고 접으며 읽었습니다.


가끔씩은 너무 집중해서 밤 9시까지 읽은 적도 있습니다. 숙소에 들어가면 거진 10시가 됩니다. 이때 사람들이 ‘너 혼자 야간 뛰고 왔냐’라며 놀리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고 책도 읽고. 이렇게 두 가지만 충실히 해도 하루하루가 꽉 찬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일하면서 자신이 소진된다고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전에 일하고 퇴근하며 유튜브 보며 게임을 하던 제 자신을 생각해 봅니다. 그때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게 지나간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허무할 때도 있었고 이렇게 시간만 때우며 사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엄습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기존과 반대되는 일을 하고 고급 원두가 아닌 믹스 커피를 한 손에 쥐고 시끄럽고 냄새나는 몽골에서 진짜 휴식이 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경험 덕분에 진짜 휴식은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란 걸 알았습니다. 조용한 카페나 장소라고 해서 책 읽기 좋은 건 아닙니다. 거기서도 스마트폰으로 온갖 뉴스와 자극적인 자료들을 본다면 내면은 이미 막노동 현장 보다 훨씬 시끄럽고 산만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시끄럽고 공부에 방해되는 장소라도 내가 충분히 집중만 할 수 있다면 내면은 그 어떤 고급 카페보다도 조용하고 책 읽거나 글쓰기 좋은 환경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몽골까지 유학(?)가 서 얻은 사실입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러한 현상을 ‘감각 게이팅(sensory gating)’이라고 합니다. 뇌는 주변 소음이나 필요 없는 정보를 자동으로 차단한다고 합니다. 게이트 덕분인지 아무리 시끄러운 곳이어도 어느 때보다 고요하게 독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 10월 즈음, 아이슬란드 여행을 결심했습니다.

얼마나 미뤄왔는지 계산하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오래되고 먼지가 켜켜이 쌓인 제 버킷리스트였습니다.

그날도 숙소에서 누워 불을 끄고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갑자기 ‘대체 언제까지 미룰 거야?’라는 내면의 고함이 들려왔습니다. 불현듯 일어나 다짐했습니다.

“지금 당장 그만두지는 못해도 작은 시작이라도 하자”


그 시작이 바로 제가 이곳에서 읽은 책들을 정리해 놓는 것이었습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주 1권씩 구입해서 무섭게 읽어버린 책들이 한가득이었습니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갑자기 거실에 책들을 들고나와 쌓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54권의 높이입니다. 다시 어떤 걸 읽어왔는지 거실 바닥에 모두 펼쳐놔 봤습니다.


 

하는 일이 전기쪽이다 보니 전기 공부도 하고 뇌과학, 재테크, 노트 필기, 금융...



이렇게 보니 참 잡스럽게도 읽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는 어떤 건 책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끔찍한 책들도 있었고(심지어 반품비를 물고도 환불 신청했습니다. 공간조차 차지하게 하는 게 싫었습니다) 어떤 책들은 몽골 도서관에서 밤 9시까지 시간조차 잊고 읽게 한 멋진 책들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꼭 한번 베스트 오브 베스트 책들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책을 정리하니 뭔가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책 정리하는 소리를 듣고 친한 룸메가 거실로 나와 저를 바라보며 한마디 합니다.



런? (Run?)


표정은 마치 엄마 아빠가 싸우고 엄마가 “00 이는 엄마 없이도 잘 살아야 해”라고 하며 가방에 옷을 욱여넣는 장면을 보는 듯한 아이의 표정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만둘 거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직은 아냐. 그래도 끝은 있겠지?

뭐, 형 인생이니까요. 


룸메는 하품하며 다시 자러 들어갑니다.


이렇게 책들을 정리해 보니 그간의 치열하게 삶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 기억할 순 없겠지만 알 수 없는 형태로 저장되어 제 삶의 구석구석에 영양가를 공급하고 생각의 방향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악동 뮤지션은 선교사이신 부모님을 따라 몽골에서 어린 시적을 보냈다고 합니다. 어릴 적 수기를 읽어보면 돈도 여의치 않고 놀 것도 없는 울란바토르에서 가족은 하루 종일 손을 잡고 걸었다고 합니다. 허허벌판의 사막에서 별을 보기도 하고 메마른 흙을 뚫고 나온 잡초들을 보면서도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때의 순수함이 노래 가사에 고스란히 묻어 나옵니다.


저 또한 몽골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가장 고요한 내면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시끄러운 환경에서 제 자신이 필사적으로 찾은 최후의 피난처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만난 고요함을 언젠가 제 작품에 나타낼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누군가 제 글을 읽거나 제 작품을 보며 깊은 고요함을 느꼈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멋진 칭찬도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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