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부활절
어제 외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벌써 연세가 95세. 반년 전 수술을 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셔서 최근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셨다. 확실히 집 가까이 이사하셔서 심심하면 찾아뵐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부담이 줄었다.
여전히 집을 방문할 때의 ‘무슨 말을 하지’라든가 ‘뭘 해야 하지’라는 부담은 있지만 조금씩 작아지고 있다.
집에 들어섰을 때, 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누워계셨다.
오늘은 아무도 안 왔었다.
간병인은 평일에 오고 어머니가 아침저녁 매일 오지만 사실 기억력도 이제 온전치 않으시다.
받아온 부활절 계란 하나를 까서 잘라 드렸다. 소금을 원하셔서 소금을 찾았지만 굵은소금밖에 없었다. 손을 씻고 한 꼬집 집어 올렸을 때 굵은소금 알갱이의 각진 모서리가 느껴졌다. 최대한 부수려고 힘을 주지만 잘 되지 않는다.
한입 드시고는 더 드시기 원치 않으셨다.
온몸에 힘도 없고 아프다고 하신다.
사실 볼일도 거의 스스로 보시는 것도 힘들어하신다.
정말 마지막순간을 어머니가 모시기 원해서 이곳으로 왔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실 무력감이 강하다.
부활절 달걀도 사실 무슨 의미가 있나. 계란도 많고 구운 계란이 더 맛있다. 나도 한입 먹고는 그냥 몰래 버렸다.
부활의 기쁨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들 계란 챙겨서 집에가라고 한다. 예전처럼 밖에 나가 계란을 나눠주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자칫 반감을 살 수도 있고 기쁨을 나눠주고 싶은 청년도 그리 많지 않다.
가만히 할머니를 보자 여러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대답을 하며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죽는다는 사실이 역력히 보인다. 인간이 아무리 위대해도 시간축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게 보인다. 그러다 할머니가 자신이 젊을 적 일제강점기 천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이를 세어보면 놀랍게도 그 시절 할머니는 한창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가 항복 선언하는 방송을 봤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셨다. 이야기를 하면서 할머니의 얼굴은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눈은 초롱초롱 해지고 얼굴은 환해지고 그 시절에 계신 것 같았다. 나는 약간의 놀라움을 감추며 할머니의 말을 경청했다. 그 시대의 분위기, 있었던 일들을 말하면서 마치 그때로 돌아가신 것처럼 웃고 말하기 시작했다.
천장의 LED는 너무 밝아 TV의 불빛이 편하다고 하시는 할머니, 그 얼굴에는 TV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과 붉은빛이 얼굴에서 반사되어 마치 아름다운 노을을 보는 듯했다. 생기라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그때 어머니가 들어왔다. 할머니 저녁을 위해 카페에서 일하고 돌아오시는 길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사라졌다. 다시 할머니의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위해 환한 LED불빛이 켜지고 한순간 보였던 노을은 사라졌다. 이후 좀 더 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어머니는 신기하다면서 말을 했다.
“할머니, 네가 간 뒤로 갑자기 살아나신 거 같다. 계속 누워있다 밥만 겨우 드셨는데 오늘은 똑바로 앉아서 TV 보고 계시더라. 얼굴에 생기가 돌고 굉장히 밝아지셨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에서 ‘이게 부활인가’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게 이런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대화를 했다. 도마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자 친지 상처들을 보여주었다.
대화, 상호작용. 그리고 부활.
단지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상대는 말했을 뿐인데, 정보의 교류가 일어났을 뿐인데 사람은 생기가 돌고 살아난다. 신기한 현상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런 순간들을 더 자주 경험하는 거겠지. 더 자주 찾아뵈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