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묻힌다 세상에 있었다는 쑥스런 덮개 아래
외할아버지와 나, 우리 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사랑뿐이었고, 내가 알 수 있는 것 또한 사랑뿐이었다. 사랑 말고는 남은 게 하나도 없다. 영화 <그레이트 뷰티>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두가 묻힌다.
세상에 있었다는 쑥스런 덮개 아래”
그렇다. 할아버지를 사랑했다는 마음 빼고는 모든 것이 ‘세상에 있었다는 쑥스런 덮개 아래’ 묻혔다. 내가 차마 전하지 못한 말들도 모두 묻혔다.
사진첩에 들어가 6월 초중순에 찍었던 사진들을 쭉 다시 보니 허탈하고 어이가 없다. 뭐 그리 즐거웠고, 뭐 그리 고민은 많았는지. 또 뭐가 그렇게 슬펐는지.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고 한가득 끌어안고 있던 것들. 나를 괴롭히던 대부분의 잡념들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 수두룩이구나. 중간중간 보이는 웃는 얼굴의 내 사진을 보았다. 몇 주 뒤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것도 모른 채 한없이 해맑은 이 아이를 어쩜 좋을까. 할아버지한테 전화 한 통이라도 더 나누었다면 이 마음이 좀 더 가벼워졌을까.
할아버지가 중환자실로 가기 며칠 전이었다. 우리는 일요일 점심쯤 만나 익숙하게 동네를 거닐고 간식을 먹고, 할아버지 집에 가서 낮잠도 청하고 밥을 먹었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항상 하던 포옹을 그날따라 왜 허리 숙여 인사만 하고 집을 나섰는지. 한 번이라도 더 제대로 안아볼걸. 감사하다고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할 걸. 여러 가지의 후회와 아쉬움이 뒤섞인다.
유독 그날은 더워서 힘들다는 이유로 몸이 축 늘어지길래 낮잠 한번 자볼까 하고 누우려고 하니,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자.”
내 뒤에서 *왕의자에 앉은 채 땅콩모양 편백나무 베개를 내민 할아버지. 피곤하고 졸려서 그랬을까. 할아버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고, 할아버지의 목소리와 할아버지가 내민 손 그리고 코앞으로 온 베개에서 훅 풍기는 편백나무 냄새만이 아른아른하다.
아직도 할아버지 집에 가면, 할아버지가 애착 소파인 왕의자에 앉아서 <미스터 트롯>을 보고 계실 거 같다. 사이클을 타러 가야 한다며 60대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강철 체력이라고 자랑하는 할아버지가, 빌라 단지 화단 앞을 어슬렁 거리는 할아버지가 생생한데. 이렇게나 생생하고 생생한데, 내가 이제 보고 만질 수 있는 건 할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사진들뿐이다.
나는 아직도 인간적이구나.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도 끝까지 인간적이구나. 피어오르는 생각들이 영화 <애프터 양>에서 언급되는 ‘인간적’이라는 표현에 가닿고 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노을빛 따라 모든 게 점점 붉게 타오르고 흐릿해진다. 전부 꿈처럼 느껴진다. 거짓말 아닐까? 현실이 맞나?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든 할아버지를 사랑했다는 진심을 제외하곤 내가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 남겨진 마음과 입가에 맴도는 말들이 많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모든 건 묻힌다.
‘세상에 있었다는 쑥스런 덮개 아래’
*왕의자
: 할아버지 집에 있는 황토색 1인용 소파로, 보기만 해도 묵직한 무게감과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나무 디테일이 특징이다. 할아버지의 애착 가구이자, 누구나 거기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게 팔걸이에 팔을 툭 올려놓는 ‘회장님’ 자세가 되어 가족들 사이에서는 종종 그것을 ‘회장님 자리’라고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