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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베티 Apr 09. 2021

타인의 취향


“넌 그때 나를 좀 말리지 그랬어.”


경은 반은 농담, 반은 씁쓸하게 말했다.


“내가 말린다고 할 결혼을 안 하냐? 네가 어련히 잘 할까 싶었지... ”



경은 어릴때부터 자기 앞가림을 잘 하는 아이였다. 생활력이 강하고 똑부러지는 아이, 어디에 내 놔도 기죽지 않는 당당한 아이였다. 반면에 나는 거스름돈도 잘 못 받기 일쑤고, 그러고 나서 따지지도 못하는, 어디에 내놔도 우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았다. 우리 엄마는 입버릇처럼 ‘경의 반만 닮으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경은 그런 나를 처음부터 좋아해줬다. 경의 말로는 ‘오면 오고 가면 가고’ 하는 내 무심함이, 침대가 있는 넓은 방을 혼자 쓰는 외동딸이면서도 자랑하지 않는 내가 좋았다고 했다. 우리는 같은 책을 읽고, 서로 음악테이프를 교환하며, 글 쓰기를 좋아했다. 취향이 비슷하긴했지만 성격도 외모도 판이하게 달랐다. 학교에서도 우리 둘이 베스트프렌드라는걸 대부분 의아해했다. 좋아하는 과목만 열심히 했던 나와 달리 경은 공부도 곧 잘했고 욕심도 있었다. 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며 없는 시간을 내어 수학과외를 해주기도 했다. 심지어 대학원서를 쓸 때 나에 맞춰 대학을 낮춰 쓰겠다고 담임에게 울며 불며 사정을 해서 나만 괜히 멋쩍게 만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경은 특유의 억척으로 승승장구했다. 회사를 위해 휴일까지 반납하며 일하는 그녀를 친구들은 이해 못했지만 회사는 그런 그녀를 알아 봐주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알아봐준 것은 회사만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경의 직장 사수였다. 그는 일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능숙하고 노련했다. 경의 첫사랑은 생일날 검은 비닐 봉지에 되는 대로 선물을 담아오는 오는 사람이었다. 모처럼 경이 노는 휴일에도 동네 친구들과 농구 뛸 약속을 먼저 잡는 사람이었다. 반면 그 남자는 아무날도 아닌데 장미 백송이를 깜짝 선물했고 주말에는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경을 데려갔다. 첫사랑과 헤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남자를 결혼할 사람이라며 소개시켜주었을 때 나는 많이 놀랐다. 조금쯤은 내가 좋아할 구석이 있는 남자일꺼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때부터 단짝인 그녀와 나는 취향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공유하고 좋아했던 것들은 나의 강한 취향에서 비롯되었고 경은 그런 나를 기꺼이 따라주었을 뿐이었던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웨딩드레스는 신부 일생의 취향이 응집된 옷이다. 대부분은 일생에 단 한번밖에 입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고르다보니 최대한 자기의 스타일을 드러낸다. 그녀가 고른 그 남자는 당연하게도 내 취향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오롯이 그녀만의 스타일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그는 풍채가 좋고 키카 크며 호탕하게 웃는 상남자였다. 외모에서 느껴지는 압도감은 둘째치고 나는 그의 제스처와 눈빛에서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에서 오래 머문, 닳고 닳은 무언가를 보았다. 그때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 없는 나였지만 본능적으로 이 남자는 내가 상대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님을 직감했다.



초면에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한강변으로 핸들을 꺾을 때부터 그랬다. “얘는 그런거 싫어해.”라고 만류하는 경의 말에도 자기가 근사한 데를 안다며 고집을 부렸다. 과연 내 취향과는 맞지 않는 라이브카페는 조악한 분위기에 턱없이 비싸기까지 했다. 십 년을 넘게 알아온 내 단짝친구 경이, 그 남자의 세계에서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며 웃고 있는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 남자 역시도 그 자리가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어느 포인트에서도 리액션을 해주지 않는 약혼녀의 친구가 영 불편했을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오가던 중 카페 근처에 불법주차한 그의 차가 견인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부랴 부랴 차를 찾으러 떠난 그들과 헤어져 등을 돌리자마자 생각했다.


왜 하필 저런 남자야.




“너 카드돌려막기가 뭔지 알아?”


“아니. 그게 뭐야.”


“비씨카드를 썼는데 카드값을 못 갚아서 국민카드로 갚고 국민카드로 못 갚은건 현대카드로 갚고 그렇게 계속 돌려막기 하면서 갚는거야.”


“그렇게까지 카드를 써야 하는 이유가 뭐야?”


돈이란 없으면 안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자란 경과 나로서는 빚을 빚으로 막는 소비가 존재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경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오빠 때문에 알았어. 그런 사람들도 있더라. ”


경은 백화점 상품권깡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명동의 구두방에서 백화점 상품권을 싸게 파는 것은 다 그런 이유라고 했다. 경이 그 남자의 카드값을 거의 다 갚았다는 걸 안 것은 청첩장을 받고 난 뒤였다. 그는 카드를 다 잘랐고, 월급통장을 그녀에게 맡겼으며 각서까지 썼다고 했다.



소박하고 검소하게 자란 경은 흔한 명품 백 하나 없는 아이였다. 자수성가한 경의 부모님도 절약을 미덕으로 가르쳐오셨다. 반면 그 남자는 풍족한 집 3대독자로 유복하게 자랐다고 했다. 헬스를 해야겠다 마음 먹으면 일단 나이키 트레이닝복에 운동화까지 깔맞춤을 하고, 수영을 배우겠다 싶으면 레슨을 끊기도 전에 오리발까지 구매하는 타입이었다. 음주가무를 즐기고 여자관계도 복잡했다. 회사내에서도 경을 아끼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결혼을 하냐고 하나같이 말렸다고 한다. ‘알고 보면 소문만큼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라서...’가 그녀가 밝힌 이유였다. 그 똑똑하던 경이, 자신도 이 결혼을 왜 하는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29살이었다.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나는 결혼이라는 의무에서는 완전히 비껴나 있었기에 아홉수가 주는 부담을 몰랐다. 반면 집안의 장녀, 커리어 쌓기에도 성공한 경에게 남은 미션은 30살을 넘기지 않는 결혼뿐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녀를 간절히 원하는 남자가 나타났고 부모님은 호방한 사위감을 좋아하셨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나 이러다가 막판에 완전 다 뒤집을지도 몰라.”


경은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똑똑한 애니까. 여태까지 뭐든 다 잘해왔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은 어떻게든 헤쳐나갈꺼니까. 너는 옳은 판단을 할 아이니까. 나는 방임인지 믿음인지 헷갈리는 가운데 그녀의 결혼에 어떤 조언도 해주지 않았다.




이혼을 하는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위자료 5천만원으로 경은 재래시장 뒤쪽에 작은 원룸을 얻었다. 정육점에서 등갈비를 노련하게 흥정하며 몇 가지 장을 더 본 뒤 우리는 조촐한 집들이를 했다. 방 하나에 화장실, 부엌 하나, 시장을 통해 난 작은 창문. 그제서야 나는 방 한칸으로 남은 그녀의 결혼을 직면했다.



“그 비겁한 인간은 붙잡아 볼 생각도 안 하고 순순히 도장을 찍더라.”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남의집 주차시비에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나는 솔직히 그 인간이 나 혼자 사는 원룸에 쫓아오면 어떡하나 좀 겁이 났거든? 같이 살자고 매달리면 어떡하나 하고 말이야. ”


“그럴 수도 있지. 너 같은 여자를 지가 어디 가서 만나. ”


“아냐. 어디 가서 점을 봤는데. 점쟁이 말이 그 남자 이미 딴 여자 있대. 그것도 아주 어린 여자랑 사귀고 있으니까 내 걱정이나 하래. ”


“ 진짜? ”


“ 생각해보니까 그러고도 남겠더라. 회사 다닐 때도 어린 알바 애들이 오빠를 엄청 좋아했거든.”


그 것 참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지, 설마 그렇기야 하겠냐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며 울며 불며 달려오는 친구를 위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 지긋지긋한 결혼에 미련이 남은 쪽은 오히려 경처럼 보였다.


이후로 나는 소주 한잔 하자는 경의 부탁을 번번히 거절해왔다. 술이 싫어서라기보다 어쩐지 경이 그 남자의 세계에 속했다 온 뒤로 나는 그녀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니 사실 그 남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경은, 내가 아직 발조차 들여놓지 못했던 진짜 어른들의 진탕에서 구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날은 경이 회사를 그만 둔 날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커플에 관한 일화를 알고 있는 회사를 더는 다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허름한 한남동 고깃집에서 만났다. 술은 이런데서 마셔야 제맛이라는 경의 추천에 따라 왔지만 내 취향은 아닌곳이었다. 기름때가 번들거리는 고깃집 식당 마루를 불편해하는 나를 보며 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 그거 아냐? 나 어쩌면 이런데서 고기 잘라야할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너가 왜 고기를 잘라?”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짜증을 내며 답했다.


“너는 모르겠지... 그런 거 고민해본 적이 없으니까. 근데...”


말 끝이 살짝 높아졌다.


“나는 농담이 아니야.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하니까. ”


경이 뒤이어 나오려던 말을 애써 삼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침묵에는 그 어디에서도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친구에 대한 원망이 묻어있었다.



경이 재혼할 남자를 소개시켜줬을 때 나는 또 한번 한강변 라이브카페에서의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의 남자. 어쩌면 경은 처음부터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내가 너무 늦게 눈치 챘을 뿐.



경의 두 번째 결혼식에는 몸조리를 하고 있던 나를 대신해 남편이 참석해주었다. 많이 섭섭해하더라고 남편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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