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CBR900RR 2003
문득 구오사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구오사는 내게 어떻게 왔을까. 생각해 보면 역시 별 기척없이 갑자기 왔다. 우연히 왔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내게 온 구오사는 그리 성해보이지 않았다. 소리는 우렁차고, 카울은 여기저기 군데군데 금가고, 깨져있었다. 색깔도 뭉텅뭉텅, 맞지않아 누가봐도 허름한 꼴이었다. 하지만 난 그 때도 돈이 없었다. 넉넉치 않았다. 바이크 타는 사치를 누리기에 부족한 월급쟁이였다. 그래도 바이크는 타야됐다. 그래도 4기통을 타야됐고, 리터급은 돼야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게 온 게 허름한 구오사였던 것이다.
혼다를 딱히 좋아한 적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더보면 꼭 혼다를 다시 타고있다. 구오사를 탈 때도 그랬다. 차라리 야마하가 더 좋았다. 알원이 더 좋았다. 그런데 구오사가 왔다. 그래도 옛날부터 타보고 싶었던 바이크다. 건담같은 로봇미가 돋보이는 앞 모습, 굵직한 타이어가 돋보이는 날렵한 뒷태. 굵직한 머플러도 박력있어 보이고 나쁘지 않았다. 앉아보면 알차치고는 편안하고, 익숙한 혼다만의 느낌이 있었다.
하루는 주말 시간을 빌어 적적한 날씨인데도 양평까지, 그 너머 청평까지 달린 일이 있었다. 무척 쌀쌀했지만 후드 점퍼를 입고 헬멧을 눌러쓰고 달렸다. 청평에 다다를 때 쯤에는 꽤 추웠다. 아마 겨울이었던 듯 싶다. 한쪽으로 한강줄기가 굽이쳤고 그다지 코너가 아닌데도 멋지게 타는 느낌이 났다. 알차란 그런 것이다. 그냥 달려도 꽤 스포티하게 달리는 느낌이 난다.
구오사가 이날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큰 앞 카울이 찬 바람을 잘 막아주고, 널찍한 연료탱크가 대충 껴안고 핸들에 체중을 다 싣고 영 꼬락서니없게 타더라도 아무문제없이 슬슬 달려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프 그립. 반만 감아도 풀 스로틀한 효과가 나는 이 싸구려 튜닝 덕분에 리터급 이상의 지배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 때도 이미 10년이 훌쩍, 아니 15년은 되었던 오래된 알차였지만, 내가 이 도로에서는 누구보다 힘이 세다는 우월감에 젖기에 충분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바이크였다.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잠시나마 '좋았다'.
내게 구오사의 기억은 그 하루에 전부 담아져 있다. 그래서 지금도 구오사를 우연히 보면,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파트너처럼. 잘 맞았던 벗처럼. 애잔한 가슴으로 둘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