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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Aug 01. 2022

노란색 부다페스트

-노란색을 품다

 (라떼를 마실 줄 모르는) 라떼 얘기 하나 들어볼래?


 때는 말이야. 비웃을지 모르겠는데 우리에게도 너희가 하는 다꾸(다이어리꾸미기)랑 비슷한 놀이가  있었단다. 작은 노트나 수첩에 비밀스럽게 취향(?)을 적어 간직하는 거지. 좋아하는 꽃,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과목, 좋아하는 친구까지. 좋아하는 나라를 적는 들도 있었어. 참 순박하지? 그땐 뭐 아이돌이라는 것도 없었을 때니까 좋아하는 가수 같은 것을 적지는 않았.

  좋아하는 친구의 이름을 함부로 적었다가 (비밀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사달 난 사이를 여럿 봤어. 오늘은 너를 좋아하지만 어제는 쟤가 더 좋았던 과거는  "우정은 변치 말자" 같은 낯 간지러운 (그러나 대단히 진심이었을) 현재의 맹세에 금이 갈 수 있었으므로 노트는 반드시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좋아하는 그 친구에게만 몰래 보여주어야 해.

  그리고  말하지. "이거 너한테만 보여주는 거야."

  그렇게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대단한 우정의 표시였지.

  

 나는 서희에게 백합과 노란색을 적어 보여줬었는데 내가 노란색이나 백합을 좋아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었으며 그냥 난 이걸로 할 거야 그런 거였어. 혹은 서희가 좋아하는 걸  따라서 썼을 수도 있어.

 백합이나 노란색을 좋아해 본 적? 사실은  없었어. 그 귀하디 귀한 백합꽃을, 내가 보면 얼마나 봤겠어. 노란색? 노란 개나리를 보면 어지러웠으니 좋아하기는커녕 싫어했다는 게 더 맞을지도 몰라.


 그 밤 페슈트 지역의 한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함포고복(含哺鼓腹)한 우리는 호기롭게 호텔까지 걸어서 가기로 의기투합 했다.

 무척 늦은 밤이었음에도 사위는 아주 밝았다. 백야였다.

 이윽고 해가 지고, 다뉴브강 양쪽에 늘어선 건물들에 일제히 조명이 들어왔다. 내가 알고 있던 형형색색 현란하고  어지러운 그런 것들 아니었다. 십자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조용하고 겸손하며 품격 있는 조명.

 호텔로 돌아오는 길을 따라  도시는 황금색으로 서서히 물들었다. 황금의 시간, 황금의 도시였다.

채도 높은 페르시안 블루로 물든 하늘과 눈부신 노랑의 보색 대비. 진주는 처음으로 노란색에 매료됐다.
세체니 다리가 공사 중이라 멀리 좌측 끝에 보이는 머르기트 다리를 건너 유턴해야 했는데, 이 강변이 예술이었다
 노란 기둥을 한 머르기트 다리 위에서 본 노란색 부다페스트. 막 앞을 지나온 국회의사당, 건너편 부더 왕궁과 성당들도 모두 황금빛 일색이었다

 머르기트 다리가 시작되는 지점, 발코니처럼 튀어나온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단추를 꾹 눌러 작동시키는  옛날식 휴대용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그 모습을 영상에 담고 있었다. 리더인 듯한 여자가 한발씩 앞으로 나오라사인을 보내기도 하고 캠코더를 든 사람이 특정 동작을 반복해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사진을 찍고 보니 노란색 필터를 끼운 듯 온통 노란사람들, 노란춤이 되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본 가장 경쾌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기분 좋은 그림이었다.

함께 춤추며 동영상을 찍고 있는 댄스동호회(?).

 한여름밤이었다. 서울을 떠나 머나먼 황금빛 이 도시에 와서 하우스와인 반잔에 거나해진 내가 신나는 음악과 춤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나. 자이브와 살사의 춤사위를 조금 아는 내 발은 달싹달싹했고, 누군가 등만 좀 떠밀어주면 함께 어울릴 것 같았으나.... 끝내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내가 선 자리에서 흐느적거리다 말았다.  부끄러움을 넘어서기에 반 잔은  부족했고 오롯한 한 잔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웅 광장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기울어진 십자가 너머로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투명한 대기 속에서  완벽한 페르시안 블루의 하늘이 아름다운 황금의 다리를 감쌌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파란색을 인 노란색의 향연은 리를 다 건너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계획에도 없었던 이 노란색 밤의 산책이 오래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음날 현지인들이 간다는 정원이 무척 아름다운 카페 Villa Bagatelle(바가텔은 <엘리제를 위하여>와 같은 피아노 소품곡을 말한다)의 맛없는 점심(과 따뜻하기까지 한 실내온도) 덕분에 디카페인 아아가 갈급했으므로 (잘 모르면 무조건 스타벅스지) 스타벅스를 찾아 들린 한 쇼핑몰에서 무려 7만 포린트를 주고 나는 노란 신발을 하나 샀다.  

 

 떠나기 전 번거로움과 설레임, 여행지에서의 낯섦과 불편함들, 돌아와 반추하는 윤색과 미화를 거친 추억이 여행의 3박자일 것이다. 그걸로 이미 충분하지만 선입견을 버리게 된다거나, 더 나아가 세계관이 변하 균열까지 겪는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진주는 이제 노란색이 좋다.

시민공원 앞 레스토랑 <군델>의 '진주'
이제 <글루미선데이>는 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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