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잠겼던 세계의하늘이 다시열렸을 때 우리 모임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지금은 고인이 된 김 모 교수를 생각했다. 재작년 마지막 강의를 마친 교수님 앞에는 여유롭고, 더 의미 있는 시간이 펼쳐져 있었다. 영어로 된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는다거나 하는.
그러나 와인과 여행과 문학을 좋아했던 그분은 정년퇴임 후 꿈꾸던 시간을 누리지 못하고 작년에 돌아가셨다.갈 수 있을 때 갑시다 내일이면 늦을지도몰라요.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비행기를 탔다.
왜 또 부다페스트냐고 다들 의아해 했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유를 딱히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내가 처음 부다페스트를 여행한 것은 레미콘 트럭이 교반을 멈추지 못하듯 거의 자학적으로일하기 시작하기 전인 2006년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문학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그만 문학 '선생'이 되어버렸는데, 벼락부자라도 된 듯 불편하고 어색하던 중이었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초짜 교수인 내 눈에는 재단과 설립자가 대립하는 것도 이상했고 교수와 교직원의 편 가르기와 찍어내기로 날이 새는 것도 생경했다. 영혼을 탈탈 털어서 버텨내야 하는 그 짓을 그만두고 나자 비로소 평화와 자유가 찾아왔다.
내 삶에서 가장 자유롭던 시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교수를 그만두고 약국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그 몇 년이라 답하겠다. 그래 봤자 원고료 몇 푼 번 게 전부고 여기저기 원고를 보내놓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백수이던 주제에 짐짓 보헤미안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 것인지 무작정 떠났었다.
한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이었는데 우리 팀은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여행 내내 거의 어머니 또래인 나를 따돌리지 않고 끼워주어 고마웠다. 함께 붙어 다니면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셀카 기능 없는 휴대폰이 상상이나 되는지?) 시시한 농담에도 깔깔대며 함께 웃던 그 시간들이 늘 그립다. 한동안 메일을 주고받았고, 특히 한 울산아가씨는 내가 다른 일로 울산에 가게 되었을 때 얼굴이라도 본다며 공항으로 나오기도 했을 정도였다. 내가 패키지여행도 잘 소화할 만큼 사회성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거리의 악사, 연주가들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여행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이번에 부다페스트에서는 음악을 들은 적이 거의 없다. 몇 몇 레스토랑에는 손님들을 위한 연주가들이 있었지만 거리는 조용하다 못해 우울했다.
부다페스트는 파리처럼 활기차지도 않았고 비엔나처럼 반짝반짝 빛나지도 않았다. 때묻은 석조건물들 사이로 난 우중충한 거리를 우울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느릿느릿 걸어 다녔다. 활짝 웃는 사을 보기 힘들었다. 유일하게 경쾌한 사람이 이탈리안 레스토랑 Comme chez soi의 종업원이었는데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면서 너무나 친근하게 굴어 관광객에 닳고 닳은 느낌이 오히려 거북했을 정도였다.그래서었을까. 미슐랭의 별을 따지는 못했어도 리뷰가 좋아 벼르던 만찬이었는데 감흥이 없었다.
인생이 그러하듯 클라이맥스는 반전을 앞에 두는 법이다. 세계 각국의 지폐를 훈장처럼 걸어둔 식당을 나와 호텔로 돌아오는 길, 눈부신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통 항금빛이었다. 술을 잘 못하는 내가 와인을 한잔 했고, 여름밤의바람은 시원했으며, 해가 떨어진 지 한참 지났음에도 하늘은 완벽한 페르시안 블루였다. 그리고 다뉴브 강이 아니던가.가슴이 먹먹했다.
오랜 기억 속 부다페스트는 다 잊어도 좋았다. 그 언저리의 고통스럽던 시간들도. 새로운 부다페스트가 측두엽을 돌아 나의 해마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니 틈입했다.
부다페스트에 가신다면 그대. 해가 뜨는 다뉴브 강과 해가 지는 다뉴브강을 보고 오셔요. 해가 뜨고 질 때 그 강을 따라 하늘과 구름과다리가 만들어내는 색의 향연을 그대가 볼 수 있다면 저 깊은 곳에서 작은 파문이일고, 제 속의 엄격함을 스푸마토로 지우며 마침내 경계를 허물고야 마는 순간과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요.
왕궁과 어부의 요새도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왕궁과 어울리지 않는 호텔 건물 뒤로 타워 크레인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