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시타델(citadella)로 가는 길목인 겔레르트 언덕에 차를 세우면서 가이드는 불쑥,
"부다페스트의 부다는 붓다, 석가모니를 말하고 그럼페스트는 흑사병일까요?"
이런 썰렁한 농담을 던졌다. 한국인 가이드들의 단골 유머가 아닌가 싶었다.
다뉴브 강을 사이에 두고 부더와 페슈트로 이루어진 도시가 부다페스트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기때문에 우리를 놀리느라 한 말인 줄은 알았지만 정확한 뜻은 사실 모르고 있었다.
부다는 물을 뜻하는 부더(헝가리 -a는 '어'에 가깝다)에서 온 말이며 페스트는 페슈트, 도자기 가마를 뜻한다. 다뉴브 강을 따라 난 도자기 굽는 마을. 과연 유명 도자기 브랜드 헤렌드와 졸너이의 나라다운 수도명이라 생각됐다.
역사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지만 가이드의 농담 덕분에 좀 찾아보긴 했다.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맞댄에스테르곰에서 부더로 수도를 옮긴 것은 몽골 침입이 있던 1265년이었고, 부더와 페슈트가 하나로 통합돼 부다페스트가 된 것은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1873년이었다. 둘을 잇는 다리들이 다뉴브 강에 놓인 시기이기도 하다.
1896년 건국 천년을 맞아 국회의사당과 성이슈트반 대성당, 밀레니엄 지하철, 회쇠크 광장 등이 건설됐다. 부다페스트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들어보았음직한 이런 건축물들은 19세기 후반,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유럽의 다른 건축물들에 비해 그렇게 젊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첫날 호텔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서 강을 따라 길게 황금빛으로 물 들었을 이 도시는 가로등만 남긴 채 그 빛이 드문드문 스러져가는 중이었다.
동이 트기 전의 다뉴브 강은 마치 진주를 숨기고 입을 꽉 다문 검은 조개처럼 보인다.여행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황금빛은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검은 어둠이 도시를 조용히 감쌌다.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는 내 입에서 탄성이 새어나왔다. 이 도시를 다뉴브 강의 진주라 부른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 진주를 숨긴 검은 조개 같은 다뉴브강
잠시 후 하늘이 게으른 몸을 뒤척이면서 해를 토해냈다. 어둠이 걷히고, 다뉴브 강 위로 화려한 데칼코마니가 펼쳐졌다.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국회의사당과 석조 건물들 뒤에서 하늘이 얼굴을 붉히고 조용히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은 다시 잔잔해졌다.
국회의사당이 고스란히 반영된 데칼코마니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일출은 여전히 감동적이고, 사람을 한껏 감상적이 되게 한다.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서울은 지금 한창 바쁠 월요일이었다. 두고 온 일과, 또 사람들이 생각났다.
휴가의 휴休는 사람인人 변에 나무 목木자로 이루어진 한자다. 대개는 쉴 휴로 읽지만 아름다울 휴로 읽기도 한다. 볼 때마다 정말 아름다운 글자라고 감탄하게 된다.
그러니까 일의 시간을 아름다운 휴가의 시간 속으로 끌고오면 안 되는 것이었다.번아웃되기 전에 떠나오기를 잘했어...
치명적일 수도 있음을 알지 못하고 시멘트 반죽을 삶 속에 덜컥 담은 후부터 쉴 새 없이 교반 작업을 반복해야 했던 이 레미콘 트럭은 안도했고, 비로소 부다페스트에 와 있는 실감이 났다. 말 그대로 오롯한 나, 진주를 위한 시간. 다뉴브 강의 진주가 '진주'를 품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이 '진주'가 다뉴브 강의 진주를 품을 시간이다. 나는 밖으로 나가 강을 따라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