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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Jun 10. 2024

거리는 사이가 아니다

 종일 환한 조명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는 蜜蠟인형처럼 보인다. 인형을 포장한 유리 상자만 없을 뿐. 사람들로부터의 거리는 고작 일 미터 남짓. 때로는 여자의 코앞으로 사람들은 스쳐 지난다. 

 

 가깝다는 것은 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를 배우던 시절에는 그 '사이트'라는 것이 웹사이트나 SNS를 가리키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가깝다는 것이 너무 혹은 지나치게라는 부사를 달고 있을 땐 아예 외면하거나 무시해야 하는 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여자도 몰랐던 것 같다. 여자를 스쳐 지나는 사람들은 여자와 아무 사이도 아니다. 거리는 사이가 아니었다. 먼 거리든 가까운 거리든.


  "계산대 바로 앞이라 위치는 좋아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본사 팀장이 S시의 B점포를 언급하며 그 말을 할 때 여자도 분명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다는 건 곧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자는 움직였다.     

 

  통장 잔고가 줄고 숫자가 7자리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의아했다. 사람들은 왜 내게 와서 말을 걸지 않는 것일까. 여자 앞을 지나는 이 사람들도,  계산을 마치고 나온 저 사람들도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말을 걸어야 숫자가 늘어날 터인데 말이다. 

 여자는 어느 날 문득 깨닫았다. 자신이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혼재된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통과 절차, 가령 문이라거나 담이라거나 하는 어떠한 물리적 장치도 없이 자신의 (사적) 공간 속으로 상대(즉 그녀 혹은 약국)가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불쾌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여자는 사람들이 약국에 와서 서 있게 되는 곳과 자신이 맨 앞으로 나섰을 때 자리하는 곳의 거리, 즉 둘을 분획하고 있는 매대의 폭을 줄자로 재어보았다. 인테리어 도면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나 심정적으로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50센티미터라는 수치. 그리고 본사와의 계약서에 명시된 위치, 마트 계산대에서 매대 바깥쪽 단면까지 3미터가 채 못 되는 거리. 

 약국은 그러니까 이미 사회적 거리를 침범하고 있었다. 자신과 관계가 없거나 친구가 아니라서 정서적인 친밀함이 없는 소위 낯선 사람들과 가지는 그 불안하고 위협적인 거리 안으로 서로가 들어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여자 앞을 지날 때 짐짓 먼산을 보았다. 불안과 위협감을 멀리하고자 하는 본능, 혹은 상대를 불안하게 하지 않기 위한 배려심으로 그들은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머물고, 멈추고, 응시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가 사라졌다. "위치는 좋아요"가 왜 허구인지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사람들은 오늘도 여자의 지근거리를 지나갔다. 팔을 뻗으면 충분히 닿을 거리에서 여자를 스쳐 지나갔다. 무려 열두 시간 동안.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들이.


 방향감각을 잃었는지 여자가 교차로 횡단보도를 니은 자 때로는 기역자로 되건너는 광경은 누가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웠는데 게다가 한쪽 인도를 통제한 위험한 다리를 불법으로 가로질러 가는 모습도 연출됐다. 

 버스정류장에서도 여자는 목격됐다. 버스정류장 불빛 아래 여자는 에드워드 호퍼의 밤의 정거장을 연상하게 했다. 

 맨발걷기 체험장을 기웃거리는 걸 본 것 같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던 어느날 도서관 문헌정보실 노트북코너에서, 손깍지를 낀 채 모니터의 하얀 도화지 같은 빈 화면을 오래 오래 바라만 보고 있는 여자가..... 드디어 목격됐다.

 근접학 Proxemics. 여자가 최근 한 분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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