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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Aug 17. 2019

나의 어린 순댓국

순댓국에 어린 나의 가족

'백암 순댓국'이었다. 아빠 월급날, 그러니까 매달 20일 즈음엔 우리 네 식구는 항상 백암 순댓국으로 향했다. 달에 한 번은 갔던 터라 기억하는 날씨도 제각각이다. 어떤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아내를 위해 설렁탕을 사 가던 날 같았고, 어떤 날은 훈훈한 석양이 가만히 내려앉는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오빠는 허여멀건한 국물에 후추 정도를 뿌려먹었고, 엄마와 아빠는 뻘건 국물에 송송 썬 파를 얹어먹었다. 손에 아담하게 딱 맞는 바가지가 띄워져 있는 동동주는 어른들을 위한 것이었다. 뜨거워서 후후- 불어먹어야 했던 오동통한 순대와 얇게 썰어놓은 고기, 텁텁한 간까지.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있더랬다. 밥상 너머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대부분 '아빠의 고된 노동 끝에 오는 순댓국이니 맛있게들 들어라' 혹은 '오늘 저녁에 엄마가 밥을 안 해도 돼서 너무 좋다' 등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4인 가족'의 고충이 담긴 이야기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즈음 한 번은 나의 고충을 이야기할 때도 있었는데, 대충 이런 대화였다.

 '친구들은 다 핸드폰 있어서 문자도 하고 그러는데 왜 나는 안 사줘'
'어린애들이 핸드폰이 뭐가 필요해, 중학생 되면 사줄게'

한창 '돌핀폰', '초콜릿폰', '고아라폰' 등 ~폰이 유행하고 있던 터라 그 '멋진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하교를 하고서도 친구들과 계속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집 전화가 아니라 본인들 손에 아기자기한 스티커를 붙인 그것으로 한다는 게 시샘이 났다. 게다가 그땐 '아웃백' 같은 '팬시하고 패뷸러스한' 패밀리 스테이크 하우스가 대세였는데, 맨날 안경에 김 서리기나 하는 순댓국이나 먹으러 가자고 태연하게 말하는 아빠가 미웠다.


아빠가 밖에서 겪었던 힘듦보다 지금 당장 나에게 핸드폰이 없다는 게 더 힘들었고, 우리 가족은 왜 아웃백이 아닌 백암 순댓국만 가는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수록 옛날만큼 경쾌하게 순댓국을 입에 털어 넣는 순간은 적어졌고 당연하게 가족끼리 외식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패밀리 순댓국 데이'다.


어느새 입사 4개월 차. 아- 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두 입에 하얗고 뽀얀 순댓국을 넣어주기 위해 아빠는 얼마나 많은 굴욕과 부당함, 어쩌다 찾아오는 보람을 느껴야 했는지 이제야 하나둘 감각된다. 왜 항상 자식은 부모의 뒤를 자근자근 밟으며 후회와 미안함, 고마움 따위의 감정만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넋두리나 하소연을 들어주는 자식새끼 하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와 아빠는 20일만 되면 늘 그렇듯 우리 손을 잡고 백암 순댓국으로 향했다. 이제는 그럴싸한 에피소드가 되어버린 나의 어린 순댓국은 이제 10일 월급날이 되면 새벽처럼 내 마음에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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