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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정 Oct 24. 2023

[시즌2] ep 1. 요가 할 운명

2023. 4. 3.

이후 게시되는 네 편의 글은 지방방송 시즌2에서

'요가, 평생 단 하나의 운동을 한다면'이라는 주제로 발행했던 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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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은 시청에서 가장 바쁜 부서로 발령을 받고 한참 일을 배워가던 때였다. 신규 임용 이후 3년 가까이 면사무소에서 등본이나 폐기물 스티커를 발급하는 단순한 업무를 보다가, 갑자기 제일 힘든 부서에서 본격적으로 업무를 배워야 했다. 부서 간의 직제 같은 단순한 내용도, 보고용 문서의 틀을 잡는 방식도, 의회와 행정부 간의 관계도 내게는 모두 배워야 할 대상이었다. 도움닫기도 없이 한번에 너무 높은 곳으로 점프를 해버린 기분, 중등수학도 안 떼고 수I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달까. 나는 간신히 출근하고, 간신히 퇴근하면서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텼다.


한동안 친구와 열심히 출석했던 헬스장도 더이상 가지 못하게 됐다. 하루 14시간 15시간을 책상 앞에 앉아서 보냈다. 평일에는 퇴근 시간을 예측할 수 없었고, 주말 출근은 당연했다. 서른이 넘어가면 살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 한다던데. 나이 들어서 운동 습관은 젊어서 만드는 거라던데. 몸이 점점 망가지는 게 느껴져서 무슨 운동이든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1:1 필라테스 수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왜 ‘필라테스’였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래도 일생에 한번쯤은 ‘필라테스 하는 나’를 보고 싶었달까? 내 형편에는 턱없이 비쌌지만 불규칙한 스케줄을 맞추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집 근처 필라테스 학원을 검색하다가 한 선생님을 발견했다. 게시글이나 사진이 투박하고 멋드러지진 않았지만, 몸에 관해서는 진심을 다해 공부하는 분 같았다. DM을 보내 사정을 설명했다. “스케줄이 너무 불규칙한데 운동을 꼭 하고 싶어요. 수업 시간을 유동적으로 맞춰 주실 수 있을까요?” 무리한 부탁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만큼 간절했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선생님은 ‘한번 해보자’고 하셨다. 그때 선생님은 큰 헬스장 안에 마련된 필라테스룸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무시로 바뀌는 스케줄을 선생님과 조율해가며 늦은 저녁, 주말 오전에 수업을 들었다. 필라테스는 생각보다 예쁘기만 한 운동이 아니었고, 땀이 뻘뻘 날 정도로 어렵고 힘들었다.


선생님과의 수업이 서너 차례 남았을 때, 선생님은 개인 스튜디오를 차리면서 헬스장을 떠나게 됐다. 아쉬웠지만 또다른 강사가 와서 나머지 수업을 메워주었고, 때맞춰 나도 본가에서 독립을 하게 되면서 필라테스 수업은 끝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같은 수강생을 받는다는 게 돈을 떠나서 얼마나 피곤한 일이었을까. 운동하고 싶다는 말, 그건 곧 살고 싶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 마음을 알았기에 선생님은 내 들쑥날쑥한 스케줄을 맞춰 주셨는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나를 움직이게 해줬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렇게 K동으로 이사를 왔다. 이제 막 지어진 아파트라 주변에 편의점 하나 없었는데, 커다란 꽃집 건물 2층에 요가원이 보였다. 집에서 걸어 3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요가원이 있다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요가원 계정에 들어갔더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불과 한두달 전까지 나와 필라테스를 했던 그 선생님이었다.


이 넓은(?) 도시 안에서 선생님이 새롭게 오픈한 요가원이, 때맞춰 내가 이사한 아파트 바로 앞에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다른 선택지도 없었지만 마치 날 위해 거기 요가원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퇴근이라는 관문이 남아있었다. 여전히 내 퇴근은 불규칙했고, 요가원 저녁 스케줄에 맞추기도 빠듯해 보였다.


몇달 후, 요가원 계정에 새벽요가 모집 공지가 올라왔다. 걸으면 3분, 뛰면 30초 거리에 요가원이 있고 새벽 타임까지 열린 상황에서 더이상은 뒷걸음칠 수 없었다. 모든 게 요가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요가가 꼭 운명같았다.


그렇게 새벽요가를 시작했다. 살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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