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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정 Oct 24. 2023

[시즌2] ep 2. 몸은 기억한다

2023. 4. 10.

처음 필라테스 수업을 받으러 온 나에게 지금의 요가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떠오른다.  


"양 어깨에 삶의 모든 짐을 올려 놓고 사시나 봐요."


매일 10시간 이상 사무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거나 책을 읽는 게 일상이었으니 선생님의 눈은 꽤 정확했던 셈이다. 목, 어깨, 날갯죽지가 늘 아팠고 다리는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부어 있었다. 그렇다고 책을 읽지 않을 수도 쓰는 삶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읽기와 쓰기로 점철된 일상을 바꾸지 못할 거라면, 거기에 운동을 더하는 수밖에 없었다.


친구와 함께 새벽요가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놀란 건, 친구와 내 몸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흔히 ‘나비자세’라고 부르는 받다코나아사나를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지만, 나는 아무리 해도 무릎이 바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정확히 짚을 수 없는 골반 안쪽 어딘가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고, 그 상태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는 응용 동작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다 보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년 반을 수련하고도 나는 아직 친구가 첫날 해낸 만큼도 모양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타고난 몸도 다르겠지만, 살아온 세월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에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이 집약되어 있다는 걸 매일 요가원에서 뼈저리게 느낀다. 오래 전 오른쪽 발목을 접질러 깁스를 한 적이 있다. 한번 다친 인대는 회복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벌써 5년이 다 돼 가는 일이고 걸을 때는 아무런 통증이 없었으니 괜찮아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가부좌 자세인 파드마아사나를 짜려고 할 때면 발목을 좀 전에 다친 것처럼 고통이 생생하게 살아나서 3분도 견딜 수 없었다. 베셀 반 데어 콜크가 트라우마를 주제로 쓴 <몸은 기억한다> 라는 책이 있다. 발목이 꺾이던 그 순간의 고통을 트라우마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내 몸은 여전히 그 통증을 기억하고 있고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몸은 상처나 고통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새삼스럽지만, 생활해 온 모든 습관이 누적되어 있는 게 몸이다. 오래도록 학생들을 가르쳐온 도반의 몸과 청소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로 단련된 도반의 몸, 잠자는 시간 빼고는 하루 종일 앉아서 뭔가를 읽거나 적으며 살아 온 나의 몸은 확연히 다르다. 나는 평생 골반을 닫는 방향으로 생활해왔으니 나비자세를 만들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일 년 넘도록 만들지 못하는 아사나가 있다면, 불과 몇 달 만에 잘할 수 있게 된 아사나도 있다. 남들보다 코어가 단단한 편이었는지 물구나무서기 자세인 시르사아사나를 만드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는 응용 동작도 무리가 없었다. 한 손과 한 발로만 땅을 짚은 채 몸을 틀어 만드는 아르다찬드라는 중심잡기가 관건인데, 그 또한 그리 어렵지 않게 해냈다. 늘 엉덩이를 뒤로 뺀 채 허리를 꺾고 살아온 덕분(?)에 코브라 자세인 부장가아사나도 부드럽게 해냈지만, 허리가 좋지 못한 도반들은 같은 동작을 수련할 때마다 힘겨워했다.


어쩌다 한 번씩 모든 아사나를 잘 하는 숙련된 도반이 있지만, 대부분의 수련자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세월이 집약된 몸으로 딱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동작을 해낸다. 선생님은 도반들이 특정 아사나를 만드는 모습만 봐도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몸의 어느 부분이 굳어 있고, 풀려 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래서 어쩌다 하나를 잘한다고 자만할 수 없고, 몇 년째 특정 동작에서 낑낑거린다 해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내 능력으로 잘하게 된 게 아니고, 내 능력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요가의 세계에서는 누구라도 몇 동작 잘 하는 걸로 거들먹거릴 수 없다. 요가는 너무도 공평하다. 모델 한혜진은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가 ‘몸’이라고 말했다. 뭘 먹었는지, 얼마나 운동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몸은 고스란히 기억해서 드러내 준다. 요가는 결국 몸으로 하는 것이니, 요가의 공평함이란 몸의 정직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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